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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면 행정복지센터

대산면 전설

옥정

금강마을에 옥정(玉井)이라는 샘이 있었는데 옛날에는 이곳을 옥정동이라 불렀는데 이곳에 아리따운 아가씨가 살았다고 한다.
어느날 아가씨는 나물을 캐러 바구니를 이고 나갔으나 불현 듯 목이 말라 참을 수 가 없었다. 그래서 석간수가 있는 옹달샘으로 갔다. 그녀가 옹달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순간 소녀는 참으로 이상한 현상을 목격하게 되었다.
화려한 옷을 입은 동자가 샘 위에 판자를 띄어 놓고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놀랐으나 호기심이 생겨 샘으로 다가갔다. 동자는 처녀를 보더니 물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처녀는 동자가 사라지자 아쉬워 그 동정을 살폈다.
그러자 동자가 갑자기 수면으로 나타난듯했다. 그때 처녀는 불시에 동자를 덥치니 동자는 의외로 순수하게 수면으로 올라왔다.
처녀는 동자의 얼굴을 보고 이 동자가 玉人이라고 생각하고 무례함을 사죄했다. 그랬더니 동자는 용왕님의 지시로 인간과 인연을 맺고자 우물위에 올라왔다가 아가씨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결국 인연을 맺게 된 두사람은 부부가 되어 아들을 낳게 되었으니 이가 곧 南原晉氏의 시조이다. 이 사람은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후손들은 고려시대에 높은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별설 1>
남원군 대산면 금강리에서 동편으로 약 300m 지점 교룡산 아래 옥정이라는 샘이 있는데 남원진씨의 시조가 이 샘에서 나왔다하여 남원진씨 문중에서 관리 보호하고 있다.
아주 옛날에는 이샘이 물길도 좋고 수질도 좋기는 하였지만 유독 뱀장어가 많이 살고 또 마을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곳이어서 식수로는 쓰지 않고 들일을 하는 사람이나 나뭇꾼들이 간혹 마른목을 적시며 이 마을 아낙들의 빨래터로 사용하였는데 어느날 한 처녀가 여러 아낙들과 함께 빨래를 하다 다른 아낙들은 모두 돌아가고 혼자서 늦게까지 빨래를 하게 되었다.
해는 기울어 어둠이 들가운데 자욱이 깔려 높은 산 아래 들녘에 혼자 있으려니 무섭기도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남은 빨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잔잔하던 샘물이 느닷없이 출렁이고 이상한 소리가 나는지라 무심결에 들여다보니 기골이 장대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홍안의 동자가 나와 처녀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후에 깨어보니 홍안의 동자는 간데 없고 옷매무새만 흐트러지져 있었다.
처녀는 뜻밖의 일을 당한지라 무슨일이 있었는지 조차 모를 지경이었고 무슨말을 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일이 있은 후 얼마가 지나 쳐녀는 배가 불러왔고 달이 차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이었다.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를 뿐만아니라 그 아비의 얼굴 조차도 모르는 아이를 낳은 처녀는 고민을 한 끝에 필경 하늘의 뜻이 있어 자신에게 아이를 내려주신것이라고 생각하고 玉井(참샘=晉)에서 얻은 아들이란 뜻으로 성을 진(晉)이라 불렀다.


<별설 2>
옛날에 금강리에 자손이 없는 집안이 있었는데 그집 아낙이 어느 무더운 여름밤에 玉井으로 목욕을 갔다. 외지고 호젓한 밤중이기에 아낙은 목욕을 하면서 옥정에다 아들 하나만 점지해 주십사하고 치성을 드렸다.
한참 치성을 드리는데 느닷없이 우물속에서 뱀장어가 튀어 나왔다. 놀란 아낙은 기절을하여 한참을 지나 정신을 차려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후 얼마되지 않아 아낙의 몸에 산기가 돌더니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낳은 아낙은 필경 무슨 까닭이 있을거라는 생각에 아들의 성을 뱀장어로 보고 얻었다.(뱀장어가 길다. 사투리로 하면 길다는 질다. 그것을 한자로 줄이면 '진'이 된다.) 하여 진씨라 불렀는데 그 아들이 남원 진(晉)씨의 시조라 한다.
현재 그 옥정 옆에는 진씨 시조의 묘동이 있고 옥정은 진씨문중에 석축하고 우물옆에 비석을 세우고 따로 옥정비를 세워 모시고 관리 하였으나 지금은 마을에 진씨의 손은 한집도 살고 있지 않다.

봉황대

남원시 대산면 대곡리 마을 앞 100여m 지점에 봉황대가 있다.이 마을은 원래 대나무가 많아 죽동이라 했는데 마을의 형태가 비봉포란(飛鳳拘卵), 즉 나는 봉황이 알을 품고 있다하여 마을 뒷산의 제월봉이 나는 봉황이요 봉황대가 봉황의 알(卵)인데 대나무가 많은 까닭도 봉황의 먹이가 대나무 씨앗이기 때문이라 한다.
봉황대의 암벽에는 봉황대(鳳凰臺)라 음각되어 있는데 옛날 어느 선비가 마을 앞을 지나다 봉황대를 보고 중국의 봉황대와 같다고하여 이곳에서 시문을 하고 풍류를 즐겼다고 하는데 이 봉황대는 봉황정 '말바위' '소바위' '탑건바위' 등으로 오밀조밀하게 구성되어 있고 봉황대를 감돌며 흘러가는 대곡천을 면하여 봉황정이 날아갈 듯 서있어 음풍농월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특히 이 마을에서 큰 인물이나 큰 부자가 나올때면 이 봉황대가 울었다하여 명암(嗚岩)이라고도 불리운다. 봉황대는 험한 낭떠러지 이지만 수맣은 사람이 몰려 들어도 추락사고 한 번 없었고 유독 개미와 모기가 없어 마을 사람들은 봉황이 자기의 알을 보호하고 있는 까닭이라 믿어와 현재 마을 공동으로 계를조직하여 봉황대를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판고개와 운교리

대산면 운교리는 풍수설에 의하면 구름다리형 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구름다리형의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대산면 금강리와 운교리의 경계인 야트막한 고개가 있는데 마을에서 이 고개가 보이면 마을이 해롭다하여 면사무소앞에 인공으로 산을 만들어 그 고개가 보이지 않도록 했고 후에는 그 고개를 파서 뱅이(방비)를 했다고 하는데, 그 고개 옆 봉우리는 마을에서 보면 시체를 묶어 눕혀 놓은 형상으로 시체봉이라 부르는데 겨울에 황새가 날라와 시체봉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였으며 이 고개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이면 모두가 천질을 앓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 고개를 지날때마다 무사함과 액운을 막아 禍을 없애고자 고개 아래에다 돌을 하나씩 던져 돌무덤을 쌓았는데 이를 사망다무락(담장)이라하여 액땜을 하였다 한다. 또 이 고개를 넘으면 금강부락 초입인데 그 주위가 꼭 상여를 메고 가는 모양이라하여 상정몰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까닭으로 운교리 마을 사람들은 면사무소 앞에다 커다랗게 산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시체봉 고개가 보이지 않도록 뱅이를 하였다가 그대로 두면 마을에 해가된다하여 지금으로부터 약 30여년전에 우물을 없애고 사망다무락을 없애고 고개를 깍아 내려 도로를 내어 마을의 액운을 막았다 해서 판고개라 부른다.

말바위와 가마바위

대산면 금성리 감성부락은 마치 천막을 펼쳐이은 듯한 산이 마을 뒤쪽에 길게 뻗어 있고 마을 당산 옆에는 큰 바위가 가로누워 있는데 이 바위를 말처럼 생겼다 해서 말(馬) 바위라고 하며 지금은 88고속도로 때문에 일직선상에 있는 큰 바위를 볼수 없지만 대산면 입구 농협창고 앞 도로 건너편에 가마바위가 있다.
마을에서 써온 재래식 천막을 차일이라 하는데 치알산, 말바위, 가마바위가 있다면 결혼풍습을 두고 하는 말이라 한다. 사람이 장가가고 시집갈때면 부귀다남하라고 하는데 이와같은 남녀간의 결혼을 상징한 자연조건이 구비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한다.
그래서 이곳 부녀자들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이 이곳에 아들을 팔고 공을 드리면 옥동자를 낳게 된다고 믿어왔다. 누가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들을 낳고자 하면 왼새끼를 꼬아 가마바위에 띠를 두르고 7일 기도를 드려 공을 드리면 소원을 성취한다고 믿었다.
또한 아이를 낳아 변변히 키우지 못하고 죽을 경우는 그 아이를 가마바위에 팔면 수명이 길다하여 아이 건강에 자신이 없는 부모들은 이 바위에 아이를 팔아 왔다. 아이를 팔때는 비단조각에 아이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어 바위에 붙이는 한편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내는데 반드시 무당의 지시에 따라 굿을 하되 해가 지면 이튿날 새벽까지 철야기도를 올리는게 상례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거의 없어져 아쉬워 하고 있다.

신계리마애여래좌상

대산면 신계리 풍악산 중턱 암벽에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자연암석의 일면을 다듬어 불상을 부각하고 광배를 새긴 마애불좌상이다. 도선국사가 하룻밤사이에 조성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니 어쨌든 대작업임에는 틀림없다. 불상은 소박하면서도 양감이 풍부하고 상호도 원만하여 어깨가 다소 넓은감이 있 으나 전체의 균형은 잘 조화되고 있다.

잉어와 석수암

풍수설에 의하면 뱀 4마리의 머리, 즉 사사두(四巳頭)의 뱀머리의 형국 즉 사두혈(巳頭穴)이 있는 곳이라하여 일찍이 뱀골이라 불러 왔으며 사투리로 비암골 또는 뱀골이라 칭하는데 지금도 주민들 간에는 그대로 부르고 있는데 한문으로 옮길 때 인화리라 하였다고 한다.

하늘 감동

대산면 월계리에 풍악산이 있는데 이 산 남쪽 기슭에 커다랗고 넓은 암석층이 있고 암석층 밑에는 암굴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석굴암에는 석정(石井)이 있었는데 겨울에는 얼지않고 여름에는 어름과 같이 차갑고 가뭄에 마르지 않고 장마가 들어도 넘치지 아니하여 일정한 수온과 수량을 유지하였다 하는데 지금은 이곳 일대의 채석작업으로 그 형태를 찾아볼 수없는지 오래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는 석수암이 있었는데 함안조씨 조효문은 조선 중종 때 인물로 아호를 월계(月溪)라 하고 송순과 벗이되어 함께 이 석굴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이 두 소년들이 밖에 외출하였다가 돌아올때면 반드시 석수암 승려들의 꿈에 그들이 보였다고 한다.
하루는 추운 겨울, 때마침 폭설이 내려 눈이 산과 같이 쌓였는데 승려들의 꿈에 두 소년의 조짐이 있어서 꿈을 깬 승려는 "허 오늘은 두소년이 눈길을 헤치고 오겠는 걸"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옆의 승려가

"아니 그래눈이 저토록 많이 왔는데 하늘을 나는 날개가 없는 이상 무슨 재주로 이 눈길을 온단 말이요"

하고 의아해 하며 묻자 꿈을 꾼 승려는

"내 꿈에 석굴암 돌샘에서 세 마리의 잉어가 노는 꿈을 보게되면 어김없이 두 소년이 나타나거든. 어젯밤에도 예외없이 이 꿈을 꾸었으니 어디 한 번 기다려 봅시다."

그런후 과연 두 소년은 책궤를 짊어지고 석수암으로 눈길을 헤치며 올라오고 있었다한다. 석수암 승려의 꿈에 항상 잉어 세 마리가 석정에서 노는 것은 그중 두 마리의 잉어는 조효문과 송순이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그 영험을 보았고 한마리의 영험은 아직 남아있어 누군가 한사람의 큰 인물이 나올것이라는 기대를 대곡리 마을 사람들은 가지고 있다하여 세월이 흘러 석수암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산신사가 세워지고 석정이 있었다는 곳엔 생수만 솟고 있을뿐 찾아볼 수는 없다.

양시랑동

대산면 대곡리 남원 48방중 대곡방이었는데 대곡방은 속칭 "대실"이라 하는데 "대실"의 대는 대나무를 뜻한다하여 대곡방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는데 풍악산 줄기가 수없이 뻗어 그중의 한가닥이 대실 동쪽을 감싸며 뻗어 있는데 이 골짜기를 양시랑동이라 부른다.
"시랑"은 조선시대 정랑에 해당하는 고려대의 정4품 문관 벼슬로 이곳에 한 무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은 부모가 살아 계실때에도 효성이 지극하였지만 부모가 돌아가시니 무덤앞에 초막을 지어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렇게 정성껏 3년을 부모 무덤에 시묘하니 나중에는 사나운 짐승호랑이도 그 효성에 감동되어 밤이면 초막을 찾아와 보호하여 주었다고 한다.
그의 성이 양씨요, 일찌기 시랑 벼슬을 하였기에 사람들은 이곳을 양시랑동이라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