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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역사 | 황죽마을과 유자광





                                    남원이 낳은 의기의 인물





                    무령부원군 유자광은 고죽동(황죽마을)에                  건을 미리알고 이를 막기위해 예종에게 고
                    서 태어난 남원 출신의 역사적인 인물이다.                변하자 조정 중신들이 들고 일어나 남이는
                    그러나 유자광은 희대의 간신으로 알려져                  죽게되고 유자광은 그 공을 인정받아 무령
                    있다.                                    군에 봉해진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일을 두
                    하지만 항간에 떠돌던 출생과 성장 과정을                 고 유자광을 간신으로 몰아치는데 이것을
                    모아 놓은 기록들을 보면 유자광은 천재였                 정반대의 입장에서 유자광이 남이에게 모반
                    으며 대단한 무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얼자                을 하자고 했다면 남이가 유자광의 말에 따
                    라는 자신의 신분에 당당히 맞선 의기의 인                랐을 것인가. 만약 유자광의 이러한 고변이
                    물이었다.                                  없었다면 역사는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었
                    유자광이 타고난 자신의 신분에 굴복하였거                 던 사건이다.
                    나 좌절하였다면 세조ㆍ예종ㆍ성종ㆍ연산
                    군ㆍ중종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친 임금을                  시기와 질투의 희생양
                    모실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조선실록 어디를 보아도 유자광을
                    역사 학자나 영화, 드라마 작가들이 그 시대               간신으로 몰아갈만한 근거를 가진 기록은
                    를 기록한 조선실록을 한번이라도 꼼꼼히                  없다. 역시 조선실록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읽어 보았다면 감히 유자광을 무고한 간신                 없다. 다만 출신성분이 미천한 유자광이 승

                    으로 낙인찍을 수는 없을 것이다.                     승장구하여 정승에 오른 것을 시기하여 어
                    실록에 의하면 예종이 즉위한지 불과 1개월                떻게든 깎아내리려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모
                    여 만에 남이와 강순이 주모한 모반사건이                 함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결국 남이의 죽
                    일어났다. 유자광이 남이와 강순의 모반사                 음이나 무오사화 갑자사화도 모두가 그들의






















                                    남원시­고죽동에­있는­유자광의­묘로­추정되는­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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