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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남원의 명인①  | 누룩 장인 정철기씨








                                                        “술의 깊은 맛은






                                                      누룩이 좌우하죠”








                                                       집집마다 술을 빚던 가양주 문화와 함께 자취를 감춘 전
                                                       통 누룩에 대한 관심이 최근 커지고 있다. 십여 년 전부
                                                       터 전통 누룩 복원을 위해 한 길만을 걸어온 수지면 출
                                                       신의 정철기(59)씨를 만나 이에 얽힌 얘기를 들어 봤다.






             누룩의 최고수를 만나다.
             조선시대만 해도 집집마다 술을 빚었다. 집마다 그 맛과 비법이 달랐고, 술을 만드는 데 빠져서는 안 되는
             누룩의 종류도 그만큼 다양했다. 밀뿐만 아니라, 쌀, 보리, 옥수수, 조 등 다양한 곡물을 활용해서 누룩을
             띄웠다. 술의 깊은 맛을 좌우하기 때문에 누룩을 만드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조선 말기까지 기록
             에 의해 전해지는 누룩 종류만 60여종(집집마다 만들었던 누룩을 합치면 이 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이었
             고, 이를 통해 360여 가지의 술을 제조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전국의 양조장이 통폐합되고, 해방 이후에는 세원(稅源) 확보를 위해 집에서 술 빚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면서 찬란했던 가양주의 시대는 끝이 나고 만다. 이렇듯 술 빚기의 맥이 끊어지면서 전통 누
             룩 또한 대부분 사라져갔다. 최근 술 빚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누룩도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전통 누룩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 십여 년 전에 해오던 사업이 망하면서 새로운 일을 모색하게 되었다. 처음엔 장 솜씨 좋던 어머니가 떠올
             라 메주에 관심을 가졌다. 좋은 메주를 만들기 위해 고서를 뒤지다가 운명적으로 누룩을 만나게 되었다. 삼
             년 동안 고서를 통해 공부했지만, 이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고문서 전문가인 이상훈씨 덕택으로 공부가 깊어지게 되었다. 이후, 국내에
             알려진 누룩의 대가들을 찾아 다녔으나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대부분 88년 올림픽 이후 급조
             된 명인들이었고, 그나마 알고 있는 비법 전수에도 인색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제
             조 방법을 정성껏 알려주던 이름 없는 장인들의 도움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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