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아이콘 또는 HTTPS 확인하기
웹 브라우저의 주소 입력창에 표시된 자물쇠 아이콘과 주소 앞 https://가 있는지 체크하여
보안적용이 되어 있는지 확인하세요.

남원시청주요 누리집 한눈에 모아보기 !

아래 마이크를 클릭하세요!

닫기

음성인식중 말씀해주세요.

닫기

[000]

"000"로 검색이 완료되었습니다.
결과페이지로 이동하시려면 "확인"버튼을 눌러주세요.

취소 확인

수지면 행정복지센터

유암리

본래 남원군(南原郡) 수지면(水旨面) 포암리(包岩里)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포암리(包岩里), 유촌리(柳村里), 갈촌리(葛村里), 둔촌리(屯村里), 가정리(柯亭里), 외호곡리(外虎谷里) 각 일부가 병합되어 유촌과 포암의 이름을 따서 유암리(柳岩里)라 하고 면사무소를 설치하였다. 1995년 1월 1일 남원시 군이 통합됨에 따라 남원시 수지면 유암리가 되었다. 유암리에는 유촌(柳村), 포암(包岩), 갈촌(葛村) 등이 있다.

유암리 유촌(柳村)마을

본래 남원군(南原郡) 수지면(水旨面) 유촌리(柳村里)지역으로 버더, 버터 또는 유촌(柳村)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포암리(包岩里), 유촌리(柳村里), 갈촌리(葛村里), 둔촌리(屯村里), 가정리(柯亭里), 외호곡리(外虎谷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유촌과 포암의 이름을 따서 유암리(柳岩里)라 하고 유암리에 편입되었다.1535년 (中宗 30년) 봄에 죽성 박씨(竹城朴氏) 연주(延柱 )라는 사람이 처음 정착하였다.이 사람은 풍수설에 조예가 깊어 견두산(犬頭山) 상봉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고, 춘삼월 버드나무에 꾀고리집이 있는 유지앵소(柳枝鶯巢)의 길지가 있음을 알고, 온 골짜기를 헤매다가 지금의 마을을 찾아 마을 입구에 버드나무를 심었는데 꾀꼬리가 모여들었다고 한다. 여기가 꾀꼬리의 집의 유지앵소의 명당터라 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 후 1650(孝宗때)년경 남원 양씨가 산 골짜기를 개간하여 살면서 부터 전남 구례 등지에서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마을앞에 버드나무를 심었더니 꾀꼬리가 모여 들어 집을 지은 유지앵소(柳枝鶯巢)의 풍수설에 의해 버드나무 첫 자 "버"와 버드나무가 섰다는 밑자리의 "터"를 합쳐 "버터"라 불러오다가 버들 류(柳)자와 마을 촌(村)자를 따서 유촌(柳村)이라 불렀다.

유암리 포암(包岩)마을

본래 남원군(南原郡) 수지면(水旨面) 포암리(包岩里)지역으로 포바위 또는 포암(包岩)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포암리(包岩里), 유촌리(柳村里), 갈촌리(葛村里), 둔촌리(屯村里), 가정리(柯亭里), 외호곡리(外虎谷里) 각 일부가 병합되어 유촌과 포암의 이름을 따서 유암리(柳岩里)라 하고 유암리에 편입되었다.1600년경(宣祖때) 부근의 터가 소가 누워 있는 와우(臥牛) 형국이라 하여 진주 소씨(晋州蘇氏)가 정착하였다. 그 뒤 조선조 말 갑오경장 때(1894년) 피난차 경주 최씨가 남원에서, 남원 양씨가 진주에서, 경주 최씨가 순창에서 각각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이 마을은 논, 밭, 길, 산, 시냇물 어디를 가나 바위와 돌이 많아 바위에 둘러싸인 곳이란 뜻으로 [포바위]라고 부르다 [포암(包岩)으로 바뀌었다.

유암리 갈촌(葛村)마을

본래 남원군(南原郡) 수지면(水旨面) 갈촌리(葛村里)지역으로 함박골, 갈볼, 갈벌 또는 갈촌(葛村)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포암리(包岩里), 유촌리(柳村里), 갈촌리(葛村里), 둔촌리(屯村里), 가정리(柯亭里), 외호곡리(外虎谷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유촌과 포암의 이름을 따서 유암리(柳岩里)라 하고 유암리에 편입되었다.1405년(世宗 32)에 진주 소씨(晋州蘇氏)가 산을 개간하여 이곳에 정착하였으며 그 뒤 전남 구례 등지에서 산전벌이로 주민들이 모여들었고, 밥을 짓는 도구인 함박을 만들려고 각지에서 함박 만드는 목공들이 모여들어 형성하였다.이 마을의 본래 명칭은 함박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해서 [함박골]이라 부르다가 나중에 견두산에서 내려 뻗은 칡이 마을 전체를 에워싸고 있어 칡을 이용해 갈퀴, 삼태기, 발대 등 칡넝쿨을 원료로 쓰는 것을 생산했다고 해서 칡 갈(葛)자와 칡이 넓다란 한 개의 벌판을 이루고 있어 [갈벌]이라 불렀다. 그 뒤 점차 이주해온 주민이 많아 마을을 형성 하여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갈촌(葛村)으로 바뀌었다.마을이 해발 250m 고지의 견두산 줄기에 자리 잡고 있어 마을 앞이 훤하게 트였는데 이러한 지형은 옛부터 가난을 면치 못하는 형국이어서 마을 앞을 막아 밖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아야 재물이 모인다는 풍수설에 따라 1820년 참나무 숲을 인공으로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