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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월면 행정복지센터

인월면 전설

피바위 전설

고려는 건국 초기에는 국력이 튼튼하였으나 고려말에 이르러서는 숭불 정치로 인한 승려들의 발호와 오랫동안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정이 극도로 어수선하였으며 왜구들은 이런 기회를 틈타 공민왕 이래로 갑자기 침략이 잦아져 거의 해마다 해안 지방을 소란케 하더니 이제는 내륙 깊숙히 쳐들어와 장기전을 펴고 때로는 개경의 변두리까지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1380년(고려 우왕 6) 왜구의 침입으로 남부 내륙을 휩쓸고 지나가자 이성계(李成桂)장군을 삼도 도원수(三道 都元帥)로 삼아 남원부 인월에 주둔한 왜구 토벌의 길에 올랐다.

당시 인월에 진을 친 왜구는 아지발도(阿只拔都)를 괴수로 하는 무리들인데 아지발도는 18세쯤 되고 특히 괴상한 힘이 있는 데다 키가 7척(尺)이 넘었으며 전신은 철갑으로 무장한 탓으로 활을 맞아도 살을 뚫지 못하니 난군중의 무인지경으로 휩쓸고 다녀 아군에게는 실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장차 개경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었으니 고려 조정에서도 당황한 나머지 우왕은 이성계를 왜구 토벌 대원수로 삼아 남원에 급파한 것이다.

이성계 장군은 여진족(女眞族)의 귀화병과 고려군의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변안열(邊安烈)을 참모로 하고 퉁두란을 부원수로 하여 전주를 거쳐 남원에 들어와 장차 인월로 향하게 되었다.
이성계 장군은 본 진을 황산에 주둔하였는데 황산(荒山)은 운봉과 동면의 중간에 우뚝솟은 해발 695m의 고지였다.
산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면 인월이 손에 잡힐 듯 한데 굽어보면 운봉에서부터 흘러오는 람천의 맑은물이 황산 밑을 감돌며 흘러간다.

아지발도는 고려 관군이 토벌 나온 것을 알았지만 자기의 용력만 믿고 교만을 부리다가 이성계 장군이 황산에 진을 친 다음에야 인월에 당도하였다.
인월과 황산은 지척지간 인지라 선두를 달린 아지발도군은 말을 몰고 순식간에 황산 및 람천에 이르러 장차 산을 기어오르려 했고 뒤에는 500여 왜구들이 들을 메우고 쳐들어오고 있었다.

이때 이성계 장군은 퉁두란과 젊었을때부터 함경도와 만주 국경지대를 휩쓸고 다니면서 사냥도 하고 무술을 익히던 사이로 백발백중을 자랑하는 천하의 명궁이었으며 이들은 아지발도의 투구를 겨냥해 활을 쏘아 입을 벌리면 입을 맞추어 죽이기로 작전을 세웠다.

작전대로 아지발도가 다가오자 첫번에 날려보낸 이성계 장군의 화살은 어김없이 아지발도의 투구에 맞히니 투구가 벗어지려하자 아지발도는 당황한 나머지 입을 딱벌려 벗어지려는 투구 끈을 턱으로 막는 순간 참으로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그가 입을 벌림과 동시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화살 한 개가 번개같이 날아오더니 벌린 입을 쾅 맞추어 목을 꿰뚫어 버렸다.
제아무리 장사인들 목이 뚫리고야 배겨날 수 있겠는가. 심장에서 내뿜은 피는 그 목구멍을 통해 분수처럼 품어져 흐르니 순식간에 바위는 벌겋게 피가 고여 냇물을 피로 물들이고 육중한 그의 몸이 중심을 잃고 마상에서 데굴데굴 그 바위로 굴러 떨어져 죽었다.

그가 흘린 피는 바위속 깊이 스며들었는지 지금도 바위를 깨면 붉은색이 나니 사람들은 이를 피바위(血巖)라 한다.
아지발도 없는 왜구들은 교전 벽두부터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오합지졸이 되었는데 고려군이 쏘아 대는 화살에 추풍낙엽이 되듯 쓰러져 가다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황산을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날의 싸움은 실로 맹렬하여 고려군은 원수와 부원수를 선두로 백병전을 감행하여 시간가는 줄 모르고 싸우자니 어느새 해는 넘어가 차츰 어두워졌다.
이에 이성계 장군은 용력을 부려 달을 잡아당겨 일찍 뜨게 하여 왜구를 무찔러 승리하게 되었고 싸움터 마을을 인월리(引月理)라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인월에 진을 치고 인근을 소란케 하던 왜구들을 소탕한 이성계 장군과 퉁두란의 용맹은 더욱 높아졌으며 그중 이성계 장군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가 그를 따르는 막료들이 늘어남으로 후일 그가 조선을 건국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으니 우리 고장 황산대첩의 참뜻은 달을 앞당겨 뜨게 했다거나 아지발도의 죽은피가 물들어 지금까지 바위가 붉다거나 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보다 이후 민심이 이성계 장군을 신격화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많은 신진 인물들이 이성계 장군의 막하로 몰리게 될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을 건국하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곽기치(郭期致) 효자

곽기치(郭期致)는 동면 자래리 옛지명 자연동(紫烟洞)에서 출생 하였다.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는데 일찍이 효성이 지극하여 새벽 일찍 부모에 문안 인사드리고 밤이면 어버이 잠자리를 보아 드리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정성을 다 하니 사람들은 그를 하늘이 낳은 효자라 칭찬하였다.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백약이 무효하거늘 하루는 엄동설한에 쑥국이 먹고싶다 하므로 유곡리에 있는 상산 깊은 골짝에 홀로 들어가 질로 쌓인 눈을 헤치고 기어이 쑥을 얻어 어머니께 끓여 드렸더니 그 길로 어머니의 병환은 차도가 있어 마침내 완치되었다.

상산은 자연동에서 25리나 되는 깊은 산중인데 추운 겨울에도 쑥을 캐낸 것은 그의 지극한 효성이 하늘에 통하심이다.
또 하루는 추운 겨울날 생대추를 원하시므로 뜰에 심어있는 대추나무 밑에 맑은 우물물 한그릇을 떠놓고 3일간 기도를 드렸더니 난데없이 지나가는 행상꾼이 생대추를 팔러 온지라 그 대추를 어머니께 드렸더니 이것도 하늘의 도우심이라 하였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목숨이 위독 하던중 갑자기 잉어가 먹고 싶어 하시므로 두꺼운 얼음을 깨고 물속에 들어가 기어이 잉어를 잡아오니 사람들은 그의 효성에 탄복하여 곽기치는 하늘이 낳은 효자라 칭찬한 나머지 그를 곽효자라 부르게 되었다.

어느덧 그의 효행이 위에까지 아는바 되어 향당 유림들의 추천으로 순조(純組 16년) 1816년에 효자 정문이 하사되어 자연동 마을앞에 그의 정려가 전해온다.
그러나 후손들이 마을에 없어 그의 무덤과 정려를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보호하고 제사를 드리고 있다.
후손이 없는 무덤이나 사당을 마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사례는 허다하지만 그 중에도 곽기치 효자 정려를 각별히 관리하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옛날 어느 도둑이 마을에 침입하여 밤에 황소 한 마리를 도둑질 해가는데 마을앞 300m앞 우측 도로변에 자리잡은 곽공의 효자정문에 이르렀더니 갑자기 무서운 회오리 바람이 일며 앞길을 막고 험한길이 여러갈래로 헛보인지라 소도둑은 혼비백산하여 소 고삐를 움켜쥔채 정문 주위를 돌며 길을 찾으려 해도 끝내 길을 잃어 동쪽 하늘이 뽀얗게 트일 무렵에야 비로소 길을 찾았으나 그때는 이미 소를 몰고갈 염두도 내지 못하고 홀몸으로 도망쳤다.

아침이되어 소를 찾아나선 마을 사람들은 곽효자 정문앞에 이르자 한가로이 풀을 뜯고있는 소를 찾게 되었다.
사람들은 의아하게 여겨 둘레를 유심히 살펴보니 정문 주위의 밭이 사람과 소의 발자국으로 아수라장이 되어있고 심어놓은 곡식이 짓밟히어 수백명의 인마가 떼몰려 지나간 것처럼 유린되어 있었다.

또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지나가는 나그네나 마을 어린이들이 정문옆에 소변을 눈다거나 하면 그 사람은 갑자기 두통이나 학질을 앓아 여러날 고생하였다 하니 누가 감히 정문옆에 함부로 소변을 누는일 없을 뿐만 아니라 곽효자 정문을 매우 영험스럽게 여겨 왔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오늘날은 예전처럼 신령스런 영험은 보이지 않으니 마을 사람들은 퍽 아쉬워 하고 있다.

해인사 화재를 진압한 생불(生佛)

동면 자래리(自來理)는 옛지명으로 자연동(紫烟洞)이라 하는데 아득한 옛날 자연동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단 둘이 사는 늙은 총각이 있었다.
이 모자는 가난하기 짝이 없어 초근목피로 근근이 목숨을 이어 오다가 어머니는 어느 절간의 식모로, 아들은 머슴살이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음씨 착한 모자는 서로 떨어져 있지만 어머니는 불당에 들어가 자주 기도하고 아들도 틈틈이 짬을 내어 어머니가 계신 절을 찾아가 어머니도 만나도 부처님께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 착하고 일도 잘하는 총각은 주인의 신임이 점차 두터워 지자 돈 꾸러미를 주면서 하동에가서 소금을 사오라고 하기에 혼자 갈 수 없어 몇 사람이 어울려 길을 떠나게 되었다.
하동을 가는 길은 지리산 벽소령의 험준한 산길을 지나가는데 소금의 집산지로 내륙 사람들은 누구나 소금을 사기 위해서는 하동에 까지 가거나 소금장수들이 하동에서 소금을 가져다 파는지라 이들도 소금을 사서 지게에 지고 다시 벽소령을 넘어오는데 무거운 소금 지게를 지고 험준한 산길을 온 터라 몸이 피곤하기 그지없어 여러번 쉬어 오던중 지금의 함양군 마천에 있는 두루소에 까지 왔을 때 바위 옆에 쉬려고 지게를 받치려는 순간 미끄러운 바위에 발을 헛딛어 두루소 깊은 물로 소금이 빠져 버렸다.

다른 물건 같으면 물속에 들어가 건져낼 수도 있으나 소금은 한 번 물에 빠지면 다 녹아 버려 흔적도 없이 되어 버렸다.
총각 머슴은 기절초풍 낙심하였으나 물에 빠져 녹아 버린 소금을 다시 찾을 수는 없고 하동까지 되돌아가 소금을 사려해도 돈이 없어 살수가 없으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총각 머슴은 빈손으로 돌아가 주인을 무슨 면목으로 대할 것인가?" 하며 눈앞이 캄캄해 오자 "산목숨 죽을 수도 없고 떠돌아 다니다 중이나 돼야겠다"하면서 다른 일행의 만류도 뿌리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로부터 그는 산 속을 헤매고 다니며 나무 열매, 풀뿌리, 솔잎으로 연명하며 밤이면 바위틈에 들어가 자니 그야말로 산짐승이나 다를 바 없이 되어 머리는 길어 땅에 닿고 손발은 부르트고 찢어졌다 아물었다를 되풀이하니 원숭이 모습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덧 세월은 5년이나 흘렀다.
5년동안 산짐승과 벗하며 살자니 이제는 호랑이와 늑대와도 친하게 되고 다른 짐승들과도 곧잘 어울리어 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하루는 마을 근처에 내려오니 절의 중 한사람이 마을로 내려와 아낙네와 하룻밤을 자고 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총각 머슴은 사람일 망정 겉은 원숭이와 같아 걷는 것조차 짐승처럼 기어다니는데 중의 뒤를 밟았더니 실상사 백장암으로 들어가는지라 다시 살펴보니 백장암 주지임이 틀림없었다.
총각 머슴은 이윽고 본색을 드러내며 벌떡 일어나서 백장암이 떠나갈 듯 소리를 지르며 승려를 꾸짖었다.
놀란 승려들이 나와 보니 머리는 길어 흩어졌으며 얼굴은 털과 흉터가 무성한데 다만 자세히 보니 사람 같기는 하였으나 나무껍질과 나뭇잎으로 몸을 감싸고 있으니 보기만 하여도 짐승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청에서 "네 이놈! 부처님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부처님을 모시는 절 중놈이 주막에 침범하여 주색을 즐기니 그러고도 부처님 앞에 떳떳할 수 있느냐"하고 외치니 짐승이 아니라 사람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가 진정 사람이라면 도사나 술사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승려들은 일제히 땅에 꿇어 죄를 빌었고 총각 머슴을 상좌에 모시게 되었고 총각 머슴에게 목욕 재계케 한 다음 법의를 갈아 입혀 놓고 그들의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곰곰히 생각하니 억울한 일을 당한 승려들은 "어째서 저 건달같은 놈을 우리가 먹여 살린단 말이냐" 이렇게 쑥덕공론을 하는 수가 많았는데 기이한 일은 총각 머슴만 원망하면 모든 승려들이 머리가 아프거나 심한 복통으로 소동을 빚다가 한시간쯤 지난 뒤에는 언제 아팠냐는 듯 통증이 없어지곤 하였다.
이런 일이 잦아지니 승려들은 어느덧 총각 건달을 살아 있는 부처 즉 생불로 숭배하게 되어 그후로는 생불님! 생불님!하며 극진히 모시게 되었다.
총각 건달이 아닌 생불이 어느날 승려들을 법당에 모아 놓고 분부하기를 "방금 해인사 법당에 화재가 났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이렇게 말하자 승려들은 모두 놀랐으나 평소 생불로 숭배하는 터라 입을 모아 진언하기를, "생불님의 신통력으로 해인사 불을 꼭 진화시켜 주십시오"하였다.

이윽고 생불은 맑은 물에 목욕하고 갈대 자리에 앉아 명상하더니 잠시후 깔고 앉았던 갈대 자리를 우물에 적셔 동북방 해인사 쪽을 향해 젖은 갈대 자리를 허공에 던졌다.
그리고 승려들에게 말하기를, "이제 해인사 불이 꺼졌노라! 그대들은 안심하라!"하고 말했다.

수일 후 승려 한사람이 빠져나가 해인사로 달려가 탐문하였더니 아니나 다를까 법당에 불이 솟았다가 잠시후 쏟아지는 우박을 맞고 불이 거짓말처럼 진화되더라 하지 않은가. 이 사실을 탐문한 승려는 백장암 자랑을 하고 싶어 그날 백장암 생불이 부린 신통력을 설명해 주었더니 이 말을 들은 뭇 승려들은 생불의 신통력에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생불과 해인사와 깊은 인연이 있다 단정하고 생불을 해인사로 모셔가게 되었으며 얼마후 고향에 외롭게 살고 있는 어머니도 해인사로 모셔가 여생을 평안하게 마쳤다 하며 자연동에는 생불의 옛 집터만이 전해 오고 세워 놓은 비는 수해로 떠내려가 흔적이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