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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월면 행정복지센터

마을별유래

중군(中軍)마을
  • 전투 군단 평성에 있어 전군(前軍)·중군(中軍)·후군(後軍)이 있고 따로이 선봉부대가 있는 것이니, 그중의 중군이 임진왜란 때 이곳 마을이 중군이 주둔한 연유로 인해 마을 이름을 중군리(中軍里) 또는 중군동(中軍洞)이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구인월(舊引月)마을
  • 고려 제23대 우왕 6년(1380) 9월 삼도도순찰사 이성계 장군이 이끄는 고려 토벌군과 인월에 본거지를 둔 왜장 아지발도가 황산에서 대전투를 벌였다.
    긴박한 전투가 진행하는 동안 날이 어두워지자 적의 행동을 탐지하기 위하여 이성계 장군이 하늘을 우러러 달 뜨기를 기원하니 동쪽 하늘에서 밝은 달이 떠올라 아지발도의 목을 쏘아 대승하였다고 전한다.
    이 황산대첩에서 달을 끌어 앞당겨 뜨게 했다는 유래가 전하여져 마을 이름을 끌인(引 )자와 달월(月)자를 써서 ‘인월(引月)’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인월역(引月驛)이 위차하여 ‘역(驛)말’로 불리다가, 그 후 마을을 분리함에 따라 구인월(舊引月)이라 부르게 되었다.
월평(月坪)마을
  • 운봉에서 박씨가 처음 입주하고 새마을 신촌으로 불리다가 후에 마을 형국이 반월형이라 월평(月坪)이라 불렀다.
    또는 마을 터가 동쪽 팔랑치를 마주하고 있어 달이 뜨면 정면으로 달빛을 받는다.
    월평(月坪)이란 마을 이름이 말하여 주듯이 ‘달이 뜨면 바로 보이는 언덕’이란 뜻으로 월평이라 하였다.
인월(引月)마을
  • 고려 제23대 우왕 6년(1380) 삼도도순찰사 이성계 장군은 이곳 인월에서 왜장 아지발도를 토벌하기 위해 황산에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치열한 전투에서 승기를 잡아가는 중 해가 서산에 기울면서 왜적의 행동을 탐지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때 이성계 장군은 하늘을 우러러 달 뜨기를 기원하였다.
    이윽고 동쪽 하늘에서 밝은 달이 떠올라 적의 움직임을 한눈에 감지할 수 있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이두란과 협공하여 두목 아지발도의 목을 쏘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황산대첩에서 달을 끌어 앞당겨 뜨게 했다는 유래가 있어 인월(引月)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인월(新引月)마을
  • 구인월의 명칭 유래와 같이 고려 제23대 우왕 6년(1380) 9월 삼도도순찰사 이성계 장군이 이끄는 고려 토벌군과 인월에 본거지를 둔 왜장 아지발도가 황산에서 대전투를 벌였다.
    긴박한 전투가 진행하는 동안 날이 어두워지자 적의 행동을 탐지하기 위하여 이성계장군이 하늘을 우러러 달 뜨기를 기원하니 동쪽 하늘에서 밝은 달이 떠올라 아지발도의 목을 쏘아 대승하였다고 전한다.
    이 황산대첩에서 달을 끌어 앞당겨 뜨게 했다는 유래가 전하여져 마을 이름을 끌인(引)자와 달월(月)자를 써서 ‘인월(引月)이 위치하여 ‘역(驛)말’로 불리다가 1956년 구인월, 신인월, 인월의 세 구역으로 분리되었다.
    이곳은 인월리에서 새로이 날로 발전되어가는 새로운 마을이라 ‘신인월(新引月)로 불리게 되었다.
서무(西茂)마을
  • 왜구의 침범이 날로 극심해지던 고려 우왕 2년(1376) 홍산(鴻山) 싸움에서 최영(崔瑩)에게 대패한 왜구는 우왕 3년(1377) 5월 또다시 대거 지리산 방면으로 침범하였다.
    왜구는 인월에 본거지를 두고 약탈, 살인, 방화 등 무도한 만행을 저지르니 조정에서 이성계 장군을 보내 황산에서 왜장 아지발도를 쏘아 죽이고 황산대첩을 이룩하였다.
    이때 인월과 가장 가까운 곳에 군사를 매복 시킬만한 요지가 있어 이 곳에 약간의 군사를 매복하였는데 인월의 서쪽에 있으므로 마을 이름을 ‘서무’라 부르게 되었다.
    또 군량이 되는 곡식을 이 곳에 비축하였으므로 곡식은 한섬 두섬 하는 것이니 섬이 ‘서무’로 변하여 마을 이름이 된 것 이라고도 한다.
    일설에 의하면 고려 때 몽고군에게 쫓기던 많은 우리 군사가 이곳에서 학살되어 묻혔는데, 동쪽 ‘무덤’을 ‘동무덤’이라 하였으며, 서쪽 무덤을 ‘서무덤’이라 하여 ‘덤’을 빼고 동무, 서무가 되었다고 하나 모두 믿기 어렵다.
  • 따라서 황산대첩 때 섬멸된 왜구의 시체를 풍천 서쪽과 동쪽에 묻었으므로 서무듬(서무)과 동무듬(동무: 취암리에 위치)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타당해 보인다.
계암(桂岩)마을
  • 이 마을은 처음에 계암리(鷄岩里)라 불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마을 사람들이 30세만 넘어서면 보통 장수를 하지만 30세를 넘기 전에 요절하니 한 동안 마을이 몰락 위기에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마을을 지나던 노인이 마을 풍수를 짚어보고는 서쪽산 매봉이 ‘매’혈이고 취암리쪽 앞산이 수리(鷲) 이 두 형국 사이에 놓인 ‘닭 바위(계암)’는 병아리(鷄)가 되어 잡아 먹히는 먹이가 되므로 마을이 재앙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을 앞 청룡날이 계수바위(桂岩)이므로 닭계(鷄)자를 빼고 계수나무 계(桂)자를 쓰면 무사하겠다는 비책을 알려주고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이 그 노인의 정체를 알고자 하였으나 종적을 알 길이 없었다.
    그 뒤 노인의 말대로 계수나무 계자로 고쳐 마을 이름을 계암(桂岩)으로 고쳤더니 과연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죽지 않고 장수하게 되었다 한다.
황이마을
  • 고려 우왕 6년(1380)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이룰 때 이 마을에 군량미 창고를 두었으므로 사창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운봉현의 영내에는 현재 운봉읍 서천리와 동면 사창리에 사창을 설치하였다.
    사창은 이조 때 각 지방의 촌락에 설치한 일종의 곡물 대여기관으로 국영기관인 의창과는 달리 현 자체에서 경영하였다.
    세종 30년(1444) 시험 시행된 이래 차차 널리 설치되었다가 순조 5년(1805) 폐쇄되었다.
    최근에 사창에서 황이 마을로 명칭이 변경 되었다.
동현(新村) 마을
  • 원래는 서무리 신촌마을로 칭하였으나 세월이 흘러 지금에 이르러 거대마을이 조성되어 인구수가 많아져 신촌마을을 분리하여 서쪽에 위치한 마을은 원래대로 신촌 마을로 칭하고 동쪽마을은 동현이라 칭하였다.
신촌(新村) 마을
  • 1961년의 대홍수로 동면 수재민을 이곳에 정착시키면서 마을이 생겼다.
    새로운 마을이란 뜻으로 신촌(新村)이라 하였다.
취암(就岩)마을
  • 중종 25년(1530) 양성지(梁誠之) 외 여러 학자들이 동국여지승람 신증판을 편찬하고 있었다.
    당시 양성지가 전국의 지형을 살피고 다닐 때였다.
    이곳 마을에 당도하여 보니 둘레의 산세가 새집처럼 생겼고 그 중앙에 독수리 모양의 큰 바위가 있는 범상치 않는 형국인지라 독수리 취(鷲)자를 넣어 취암(鷲岩)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독수리 취자를 따를 취(就)자로 고쳐 취암(就岩)으로 하였다.
    일명 수리바우. 한때는 취암(鷲岩)을 잘못 읽어 용암(龍岩)으로 불린적이 있었다.
동무(東茂)마을
  • 취암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이 거북등 같다고 하여 거북구(龜)자를 써서 구평(龜坪) 혹은 아홉평으로 불리다가, 황산대첩시 섬멸당한 왜구의 시체를 풍천을 경계로 서쪽과 동쪽에 묻었는데 이 곳이 풍천 동쪽에 있어 동쪽 무덤이란 뜻의 ‘동무듬’ ‘동무동’으로 불리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무덤을 돌보지 않아 풀이 무성하여 무성할 무(茂)를 써서 동무(東茂)로 표기하였다.
덕실(德實)마을
  • 동무마을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6·25때 수복난민 정착농원으로 지정되었다가 집 없는 사람들이 덕실이라는 마을로 정착하였다.
    일명 새동네, 덕실, 정착지, 신촌으로 불리어 왔다.
외건(外乾)마을
  • 원래 이 마을은 물이 귀하다 하여 마를 건(乾)자를 써서 건지산(乾芝山)이라 하였다.
    그런데 주씨가 권세를 누리며 살 당시 중만 오면 태테를 먹이곤 하였다.
    태(太)테란 너른 보자기에다 마른 콩(太)을 말아 사람의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듯 두른 다음 콩이 말린 띠에다가 물을 부어 콩이 불어나면서 옥조이는 고통을 주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중이 마을에 들어와 시주를 구하자 주씨는 여느 때처럼 태테를 매려 하였다.
    그러자 다급해진 중이 말하기를 태테만 매지 않으면 물을 해결해 준다고 하였다.
    주씨는 마을의 가장 큰 문제인 물 부족을 해결해 준다고 하니 귀가 번쩍 뜨여 그 중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였다.
    중의 말인즉슨 마을 한가운데 큰 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를 베면 물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곧 마을 장정들을 시켜서 그 전나무를 베니 그곳에서 물이 나와 마을의 부족한 물이 해결되었다.
    그러나 배형국인 이 마을에서 전나무는 돛대였으니 돛대 없는 배는 향해를 할 수 없는 법이다.
    결국 주씨는 쇠퇴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후 행정 개편에 따라 외건지로 또는 바깥건지산으로 불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건(內乾)마을
  • 이 마을은 지리적 요인으로 물이 풍부하지 못하여 주민들은 물을 갈망하는 심정에서 마을을 하늘이 보호해야 한다는 뜻으로 (乾)자를 따서 건지라 불렀다.
    건지리를 통과하는 도로의 동쪽을 내건, 서쪽을 외건이라 하였는데 이곳은 도로 동쪽 마을이 되어 내건 마을이 되었다.
    안건지산이라고도 한다.
    그 후 주민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지하수를 개발하여 식수 걱정이 없게 되었다.
지산(芝山)마을
  • 1970년 집단 이주 당시 지산초등학교와 관내에 건지산이 있으므로 지산리라 칭하게 되었다.
유곡(酉谷)마을
  • 마을 동쪽 연비산(鷰飛山)은 예부터 솔개(독수리)가 날아가는 형국에서 불리어진 이름이다.
    그런데 풍수적으로 독수리에게는 먹이가 있어야 하는데, 연비산 아래 위치한 이 마을이 지형상 독수리의 먹이에 해당하는 닭의 구실을 하여 독수리인 연비산의 정기를 집중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닭유(酉)자를 넣어 ‘유곡리’라 지었다고 한다.
    따라서 일명 ‘닭실’이라고 한다.
    마을 앞에는 석장승이 2기 세워져 있는데 이는 연비산 서쪽 골짜기에 있던 옛날 사찰의 유물이라 추측하고 있다.
도장(道庄)마을
  • 1852년에 동복오씨 어느 선비가 이곳에 터를 잡아 살았더니 마을이 안정되고 가족들이 건강한지라 정신 수양의 도장이란 뜻으로 도장(道庄)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전래되는 말처럼 군량미를 저장하던 곳이란 뜻에서 도장(稻庄), 즉 벼(곡식)를 쌓아둔 곳집이란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측된다.
성내(城內)마을
  • 이 마을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 신라의 영토에 속하였다.
    마을의 서북쪽 3km 지점 아영면 성리(城里)에 성리산성이 있고, 동북쪽 1km 지점에 토성(土城)이 있어 그 안에 마을이 있으므로 성안이라 이름을 지었다.
    ‘성안’을 한문으로 성내(城內)라 쓰게 되었으나 지금도 마을에서는 ‘성안’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상우(上牛)마을
  • 순조 20년(1820)경 은암거사(隱庵居士)가 은거하였으므로 ‘은마을(隱里)’라 불리다가, 그 후 풍수설에 따라 지형이 소가 누워 있는 와우형국(臥牛型局)이라 하여 와우리(臥牛里)라 불렀다.
    이어 행정구역 분리에 따라 상우리와 하우리로 분리되었으나 이는 은거한다는 ‘은마을’을 소리나는 대로 표현한 것이므로 상우라는 일명 ‘웃소근’ 또는 ‘상속은’이란 의미가 된다.
  • 한편으로 ‘은거한다’ 뜻을 가진 ‘웃소근’을 한자로 표기하자면 상은리(上隱里)로 표기해야 옳을 듯 한데 상우(上牛)로 표기한 것으로 짐작된다.
    혹은 속된 것이 숨었다는 속은리(俗隱里)나 임진왜란 때 함양에 대군, 중군리에 중군, 이곳에 소군이 주둔했다고 해서 소군리로 불렀다고도 한다.
하우(下牛)마을
  • 순조 20년(1820)경 은암거사(隱庵居士)가 은거하였으므로 ‘은마을(隱里)’라 불리다가, 그후 풍수설에 따라 지형이 소가 누워 있는 와우형국(臥牛型局)이라 하여 와우리(臥牛里)라 하였다.
    행정구역 분리로 상우리와 하우리로 분리되었으나 지금도 여전히‘은마을’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소근리’ 또는 ‘속은리’는 은거한다는 ‘은마을’을 소리나는대로 표현한 것이므로 하우리는 일명 ‘아랫소근’ 또는 ‘하속은’으로 불리기도 한다.
  • 다른 한편으로 아랫소근을 한자로 표기하자면 하은리(下隱里)로 표기해야 옳을 듯 한데 하우(下牛)로 표기한데는 마을터가 와우형국이라 소가 앉은 자리란 뜻의 ‘소구니’에서 유래하여 ‘아랫소구니’를 하우(下牛)로 표기하였다고 한다.
성산(城山)마을
  •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방인 이곳에는 마을 남동쪽에 합미성(合米城)이 있어 마을이 성의 북서쪽에 해당하므로 오랫동안 성북리(城北里 )또는 성복골로 불리어 왔다.
    성복골은 성 옆에 성인동과 복덕촌이 있었는데 두 마을의 첫글자를 합쳐 성복골로 불렀다고 한다.
    그 후 1914년 ‘성산’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용주(龍珠)마을
  • 고종 20년(1883년)경에는 서씨·김씨·심씨가 모두 이주하여 정착한 후 처음에는 속칭 ‘논거리’, ‘농거리(龍珠)’라 불리어 왔다.
    마을 앞에는 밀양 박씨의 묘가 있는데, 무덤의 형세가 갈룡음수(渴龍飮水)격이라 그중에서 ‘용(龍)’를 따고 또 무덤 앞에 구슬형의 산이 있어 구슬 주(珠)자를 따와 1950년 경 용주(龍珠)로 개정하였다.
장평(長坪)마을
  •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 전 산과 들이 평탄하고 길다 하여 속칭 ‘건평전’이라 불리던 곳인데, 1970년 독립가구 집단 이주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면서 장평이라 개칭되었다.
자래(自來)마을
  • 이 마을은 삼국시대 신라의 영역으로서 임진왜란 이전에는 자연동(紫烟洞)이라 불리었으나 김잠(金潛)이 장수군 산서면 사상리로부터 왜란을 피해 스스로 찾아들어 무사하였다 하여 마을 이름을 스스로 찾아든 마을이란 뜻으로 자래리(自來里)로 부르게 되었다.
    한편으로 지형이 자래(자라)처럼 생겼다 해서 자래리라 하였다고도 한다.
연실(連室)마을
  • 예부터 점촌은 도자기를 굽는 천민집단 마을이었다.
    그러한 전통적인 관념 때문에 현대에 와서도 주변 마을로부터 무시 받는 경향이 많아 마을 이름을 바꾸기로 하였다.
    그래서 옛날부터 연화도수(蓮花到水)의 명당터라고 전해오던 이곳을 최근 연곡 또는 연실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본래 점촌이라 부르며 도자기 가내공업 마을이었는데 이 점촌은 아영면 당동으로부터 옮겨와 최근까지 점촌이라 불러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