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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동 행정복지센터

교룡산성

교룡산성

  • 소재지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산성순환길 714
  • 종목 :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제9호
  • 시대 : 백제시대
  • 지정일 : 1973. 6. 23

교룡산성은 현재 남원시 산곡동 소재 교룡산(蛟龍山)에 있다.

[동국여지승람] 남원성곽조를 보면, 교룡산성은 石築周 5717尺 高 10尺 內有 99井, 小溪 又有軍倉 이라 하였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在西北 周圍 1,125步 石城內有泉六 又有小溪冬夏不渴 有軍倉 이라 기록되어 있다.
또 [문헌비고]에는, 在府北 石築 周5717尺 高11尺 宣祖朝 倭亂時重修 舊有99井 今存8井 이라 하였다.

이러한 문헌의 기록들로 보아 교룡산성의 처음 축조 년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조 선조때에 중수한 것만은 틀림없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11월조를 보면 도원수 권율이 승병장 처영에게 명하여 교룡산성을 수축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하여 처영은 당시 의령에 있다가 이곳 남원으로 옮겨와 교룡산성을 수축하였다고 한다.
그 뒤 변사정이 교룡산성 수어장이 되었다고 한다.
[태종실록] 10년조에는 경상 전라 제주의 요지산성의 수축을 명한 바 있는데 그 가운데 전라도 관내에는 담양 금성산성, 정읍 입암산성, 고산 이흘산성, 도강 수인산성 나주 금성산성 등과 함께 남원 교룡산성은 첫 손가락을 꼽혔던 곳이다.
또 숙종 30년 때에 순찰사 민진원이 산성의 수축을 상계하여 부사 김창석과 영장 박창윤이 일을 담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여지도서]보유(補遺) 남원조에 의하면, 守禦將 本府使 別將一 僧將一 監官自壁 軍官二 代將一 守城自壁守堞軍官 五百名 屬邑 求禮 谷城 玉果 昌平 長水 居僧十三名 居民 十八戶 이라 하였다.

이 비문은 崇禎紀元後 八十六年癸巳五月에 쓰여진 것으로 공사는 그 전 해인 壬辰 9月부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보아 승정기원후 86년 계사는 조선조 숙종 38년, 서기 1712년에 해당되기 때문에 홍예문의 축조는 숙종 39년인 서기 1713년 5월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홍예문은 넓이 2.25m 높이 2.40m이고 홍예의 두께는 1.63m이다.
홍예문 위에 초루( 樓)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없다.
옹성은 북쪽벽이 6.20m인데 동서로 뻗다가 일직선으로 꺾이어 남쪽으로 6.30m 뻗어있다.
입구의 넓이는 4.40m이다.

남원지역에 남아 있는 30여 개 산성 중에서 그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교룡산성은 교룡산 정상과 동쪽으로 형성된 계곡을 두른 포곡식 산성이다.
삼국시대 말기 백제가 축성하였다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말 이성계가 이곳에서 왜구를 맞아 싸웠다고 하며,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승병장 처영(處英)이 홍예문을 다시 쌓는 등 크게 보수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성 앞에 이르렀는데도 홍예문은 보이지 않고 성벽만 보인다.
성벽은 자연석이 아닌 잘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쌓았으며, 현재 약 3km 정도가 남아 있다.
성벽 귀퉁이에서 성안으로 통하는 길이 오른쪽으로 꺾여 있다.
이는 본래 성벽과 평행하게 쌓은 외벽으로 그 안쪽에 성으로 통하는 문이 감추어져 있다.
이 이중벽 사이로 들어가 다시 왼쪽으로 꺾인 곳에 조그만 홍예문이 있다.
이것이 교룡산성의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고 하는 동문으로, 원래 문루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고, 계곡 쪽에 수구와 홍예문만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홍예문을 들어서면 좁은 비탈길이 나서는데, 길 오른쪽에 비석군이 있다.
교룡산성을 지켰던 역대 무관 별장들의 기적비(紀績碑)들이다.
비석군 맞은편에 김개남 동학농민군 주둔지라는 작은 푯말 하나가 있다.
1895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의 지도자인 김개남(金開南, 1853∼1895)은 남원성을 점령하고 이 교룡산성을 거점으로 활약하다가 끝내 여원치에서 관군에게 패하였다.
한때 교룡산성에 김개남과 농민군이 주둔하였던 것을 기념한 표식인 것이다.
산성 안에는 옛 용천사(龍泉寺)였던 호국사찰 선국사가 있다.
선국사로 이름을 고친 연대나 유래는 알 수 없으며, 약 200여 년전에 만든 북과 승장동인(僧將銅印) 등이 남아 있다.

남원은 하동∼구례∼곡성을 거쳐 광한루 앞에 도착하는 섬진강 뱃길과 운봉∼함양을 거쳐 진주까지의 육로가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북쪽은 풍악산(603m)의 연봉들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반대쪽은 지리산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인 남원에서 유사시에 적과 맞서 싸우기에 가장 효과적이었던 곳은 가운데에 독립하여 우뚝 솟아 있는 교룡산(蛟龍山, 518m)이었다고 한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성의 관군과 백성은 모두 교룡산성으로 옮겨 일대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원군으로 와 있던 명나라 장수 양원이 이러한 사정을 잘 모르고 평지인 남원성에서 싸우기를 고집하여 교룡산성을 버리고 나왔다가 남원성에서 참패를 당했다.
교룡산에는 교룡산 국민관광단지가 조성되었으며, 관리사무소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가면 나오는 화장실 뒤 물레방아 옆에는 조선 후기에 생산의 풍요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남근석이 하나 있다.
약 1m 정도 크기로 화강암을 깎아 귀두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는데, 원래는 시내 동충동 읍사무소 앞에 있었다.
또 조선시대 여류시인인 김삼의당 시비와 방원진 문학비 등이 있다.

우리 고장 주생면 출신인 조선시대 문학자 양성지가 쓴 '교룡산성에 올라' 라는 시를 보면,

登南原蛟龍山城 교룡산성에 올라
邑在湖南山水間 / 남원고을은 호남 산수간에 있고
孤城屹屹路回盤 / 외로운 성 우뚝우뚝 길을 돌아 자리하니
帶方自是雄藩地 / 대방으로 부터 남경의 땅이 되었네
控抱猶能制人蠻 / 만방을 제압하던 요충지로다

- 양성지(梁誠之)-
위의 시에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자주적 역사 의식 속에서 고향 남원에 대한 다정한 정감의 마음과 청만한 기상이 고양된 자긍심이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자료제공 : 남원문화원)

부가 정보

돌로 쌓은 이 산성은 해발 518m인 험준한 교룡산을 에워싼 것으로 둘레는 3.1km 가량에 이른다.
산 중턱에 성벽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으며, 동쪽에 계곡이 있어 그곳에 무지개형 출입문을 두었다.
성을 처음 쌓은 내력은 분명치 않으나, 그 터와 형식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금산사에서 온 승병대장 처영(處英)이 고쳐 쌓았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성안에는 우물이 99개나 있었고 밀덕봉과 봉덕봉 등 산세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유사시 인근 주민이 대피하기 좋은 천혜의 요새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