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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동 행정복지센터

만인의총

  • 만인의 총 사진
  • 만인의 총 사진
  • 소재지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만인로 3
  • 종목 : 사적 제272호
  • 시대 : 조선시대
  • 지정일 : 1981. 4. 1

만인의총은 정유재란(1597)때 나라를 지키다 순국하신 민·관·군 1만여명의 충혼을 모신 곳으로, 충열사에는 임진·정유재란때 순국한 50여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1592)때 호남을 범하지 못하여 승전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왜적은 15년 14만대군으로 다시 침략의 마수를 뻗쳐 전라도를 침공키 위하여 적의 우군은 전주성을, 좌군과 수군 5만6천은 남원성을 공략하였다.
남원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키는 중요한 전략상의 요충지로 나라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방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1천여 군사와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병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하였다.

8월 7일 왜군의 선봉대가 남원 지역에 모습을 나타냈고 12일에는 왜군의 주력군이 남원성 아래 집결하여 남원성 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동문에는 양위옌, 남문에는 명군(明軍)의 천총(千摠) 지앙삐야오(蔣表), 서문에는 마오 청시엔(毛承先), 북문에는 이복남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하였다.

13일∼16일 나흘동안 혈전이 전개되었다.
쳐들어오는 왜군과 맞서 침식도 잊은 채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다음날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양원은 포위망을 뚫고 서문을 통해 달아났다.
이 싸움에서 접반사 정기원, 병사 이복남,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별장 신호, 부사 임현, 통판 이덕회, 구례현감 이춘원 등 주민 6천여 명을 포함한 1만여 의사들은 혈전 분투하다가 장렬하게 모두 순절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피난에서 돌아온 주민들이 시신을 한무덤에 모시고 1612년(광해4년) 충열사를 건립, 전라병사 이복남 등 8충신을 모셨으며, 1653년(효종4년)에는 충열의 사액이 있었고 1675년(숙종 원년)에 남원역 뒤로 이전한 후 1871년(고종8년)사우가 철폐되어 단을 설치하고 춘추로 제사를 지내왔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단소를 파괴, 재산을 압수하고 제사마저 금지해 오다가 해방과 더불어 사우를 일으키고 제사를 다시 모시게 되었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허술한 묘역을 보고 이장을 검토하여 현위치로 이전 사적 제102호였던 이곳은 이전으로 인하여 해제되고 지금은 사적 제272호로 지정되었다.
정화사업은 1977년부터 호국선현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1979년 정화를 마치고 충열사에는 50명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9월26일(정유년 음8월16일 해당)에 만인의사 순의제향을 드리고 그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자료제공 : 남원문화원)

부가 정보

이곳은 정유재란 때 왜적을 맞아 남원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민·관·군을 합장한 무덤이다.
남원은 호남 곡창의 관문이자 서울로 통하는 길목으로 이곳에서 격심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십만 왜군이 남원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으며 성안에서는 정기원·이복남의 지휘 아래 민관군이 굳게 뭉쳐 성을 방어하였다.
결국 성이 함락되어 거의 만명에 달하는 주민과 관군이 죽음을 맞았다.
치열한 전투 끝에 파괴 또한 극심하여 성안에는 겨우 민가 17가구만이 남았다.
훗날 순절한 이들을 한 곳에 묻고 사당을 지어 추모하니 국왕이 이름을 내려 충렬사(忠烈祠)라 하였다.
근래에 무덤과 사당을 이곳으로 옮겨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두려움과 고통을 감내한 의로운 선조의 강직한 절개가 새삼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