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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야 칼을 만들 수 있었다.
지리산 운봉은 철의 생산지였다.
가야 때부터 양질의 철이 생산되던 운봉고원
은 일본으로 철을 수출 할 정도였고, 그 철
을 다루는 대장간이 많았다. 그러자니 철을
다루는 기술 또한 우수했다. 한때는 인월에
대장간이 여섯 개나 있었다는 구전의 이야기
도, 그 같은 상황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러한
이야기는 칼조차 챙기지 못하고 허겁지겁 퇴
각하던 상황에서, 칼이 필요했던 왜군이 운
봉으로 오게 된 첫 번째 이유로 보인다.
다음은 왜군 병사들 개인용 나무 그릇이었
다. 섬나라 사람들의 특징인 국 없이 밥을 먹
지 못하는 것은, 전쟁 통에도 예외일수가 없
었다. 그래서 나무로 만든 개인용 국그릇을
가져야 했기에 목기의 재료와 기술을 가진 운
봉을 택한 것이 두 번째 이유로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말발굽 편자였다.
말이 가지는 기동력은, 말발굽의 관리가 생
황산대첩비문
명이었다. 전쟁 중에 많은 이동과 불편한 길
릇, 그리고 닳아버린 말발굽용 편자가 필요 을 다녀야했던 말발굽에는 다양한 맞춤형 편
했을 것이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지 자가 있어야 했고 그것은 쉽게 확보할 수 있
리산 운봉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또한 대장간과 철과
왜군들은 전쟁에 나갈 때는 반드시 세 가지 훌륭한 쇠 다루는 기술이 있어야 가능했다.
를 챙겼고, 그것들을 목숨과 같이 여겼다고 그곳이 운봉고원이었고 인월이었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전략상 그리 유리해 보이지도
남원을 방문했던 고려 말 황산전투에 참가했 않는 인월 중군동에 진을 치게 되었는지도 모
던 말발굽 편자 병의 후손은 그와 같은 이야 를 일이다. 이 세 가지가 다시 갖추어지면 왜
기를 들려주면서, 그 세 가지를 모두 잃어버 군의 전력은, 상상을 초월한 전투력을 다시
린 왜병들이 지리산으로 그것들을 구하러 갔 회생 시킬 수가 있었다. 고려군은 아마도 그
을 것이라고 했다. 것을 염려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급하게
그 세가지중 기본적인 것은 전투용 칼이었 이성계장군을 운봉으로 보냈고, 다급한 전투
고, 병사들마다 가졌던 개인용 나무그릇이었 를 해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
으며, 말발굽 편자용 쇠가락이었다. 칼은 대 지리산 운봉이 전략적 요새를 갖춘 지역이라
장간이 있어야 만들 수 있고 대장간은 철이 있 는 이야기만으로는, 지리산 운봉에서 벌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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