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 - 2014_52
P. 25

나라 부총병 양원(楊元)의 3천 병사로 하여                온 몸으로 죽음을 죽음으로써 상대해야 했
                   금 남원성을 지키게 하였다. 음력 8월 9일                다. 교룡산성과 만복사지, 만인의총, 남원
                   왜군 선발대가 오고, 12일 왜군의 주력군이                읍성을 따라가는 교룡산성둘레길은 이렇듯
                   남원성 아래 총 집결하여 성을 포위하고 공                 남원과 민족의 아픈 역사가 묻어나는 길이기
                   격하기 시작했다. 13일에서 16일까지 나흘                도 한 것이다.
                   동안 혈전이 벌어지고, 쳐들어오는 왜군과                  만인의총에서 전주방향으로 도로 옆 인도를
                   맞서 침식도 잊은 채 민ㆍ관ㆍ군이 합심하여                 따라  중앙하이츠콘도와  전북지방공무원교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다음날 남원성은 결                  육원을 지나 1km 쯤 걸어가다 보면 교룡산
                   국 함락되고 말았다. 북문을 지키고 있던 조                성으로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88고속도로
                   선군이 결사 항쟁하면서 끝까지 버텼으나 더                 위를 통과하는 찻길 옆을 따라 조금만 올라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자, 전라병사 이복남                가면 교룡산성둘레길의 출발지인 교룡산국
                   은 휘하 장병들과 함께 화약고에 불을 질러                 민관광단지로 되돌아온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주민 6천여
                   명을 포함해서 1만여 명이 사망하였고, 용성                 청소년과 함께 걷는 배움의 길
                   관과 광한루를 비롯한 남원의 관아와 누정이
                   모두 불타고 성안에 즐비하던 민가도 17동                 굳이 교룡산에서 출발하지 않고, 역으로 만
                   만 남고 모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복사지에서 시작하여 만인의총을 거쳐 교룡

                                                           산성으로 방향을 잡는 것도 좋은 코스다. 오
                   전쟁이 끝난 뒤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순절                 히려, 이런 순서로 탐방하는 것이 남원이 가
                   한 이들을 한 곳에 묻고 그들을 추모하는                  진 역사문화의 깊이를 느끼기에 더 좋을 수
                   사당을 지었는데, 광해군이 이 사당을 충                  도 있다. 특히, 지역 청소년들에게는 도보를
                   렬사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근래에 무덤                  통해 남원이 가진 역사ㆍ문화의 가치를 배우
                   과 사당을 현재 만인의총 자리로 옮겨와 성                 고 익힐 수 있는 길이자, 자기 고향에 대한
                   역화 하였다.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는 길이다. 봄날 꼭 우
                                                           리의 아이들과 함께 남원의 길을 걸어보자.
                     죽음으로 왜구와 맞서 남원읍성


                   만인의총 맞은편에는 최근 일부 복원한 남원
                   읍성(사적 제298호)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에 남원에는 지방 행정중심인 소경(小京)이
                   자리하였으며, 그에 따른 성곽이 있었다. 중

                   국식 읍성을 본떠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규모
                   는 3.4km 가량의 둘레에 높이 4m 정도였
                   으며, 사방에 문을 두었다. 이 성안에서 남
                   원의 백성들은 나라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일부­복원된­남원읍성


                                                                                                    25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