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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부총병 양원(楊元)의 3천 병사로 하여 온 몸으로 죽음을 죽음으로써 상대해야 했
금 남원성을 지키게 하였다. 음력 8월 9일 다. 교룡산성과 만복사지, 만인의총, 남원
왜군 선발대가 오고, 12일 왜군의 주력군이 읍성을 따라가는 교룡산성둘레길은 이렇듯
남원성 아래 총 집결하여 성을 포위하고 공 남원과 민족의 아픈 역사가 묻어나는 길이기
격하기 시작했다. 13일에서 16일까지 나흘 도 한 것이다.
동안 혈전이 벌어지고, 쳐들어오는 왜군과 만인의총에서 전주방향으로 도로 옆 인도를
맞서 침식도 잊은 채 민ㆍ관ㆍ군이 합심하여 따라 중앙하이츠콘도와 전북지방공무원교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다음날 남원성은 결 육원을 지나 1km 쯤 걸어가다 보면 교룡산
국 함락되고 말았다. 북문을 지키고 있던 조 성으로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88고속도로
선군이 결사 항쟁하면서 끝까지 버텼으나 더 위를 통과하는 찻길 옆을 따라 조금만 올라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자, 전라병사 이복남 가면 교룡산성둘레길의 출발지인 교룡산국
은 휘하 장병들과 함께 화약고에 불을 질러 민관광단지로 되돌아온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주민 6천여
명을 포함해서 1만여 명이 사망하였고, 용성 청소년과 함께 걷는 배움의 길
관과 광한루를 비롯한 남원의 관아와 누정이
모두 불타고 성안에 즐비하던 민가도 17동 굳이 교룡산에서 출발하지 않고, 역으로 만
만 남고 모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복사지에서 시작하여 만인의총을 거쳐 교룡
산성으로 방향을 잡는 것도 좋은 코스다. 오
전쟁이 끝난 뒤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순절 히려, 이런 순서로 탐방하는 것이 남원이 가
한 이들을 한 곳에 묻고 그들을 추모하는 진 역사문화의 깊이를 느끼기에 더 좋을 수
사당을 지었는데, 광해군이 이 사당을 충 도 있다. 특히, 지역 청소년들에게는 도보를
렬사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근래에 무덤 통해 남원이 가진 역사ㆍ문화의 가치를 배우
과 사당을 현재 만인의총 자리로 옮겨와 성 고 익힐 수 있는 길이자, 자기 고향에 대한
역화 하였다.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는 길이다. 봄날 꼭 우
리의 아이들과 함께 남원의 길을 걸어보자.
죽음으로 왜구와 맞서 남원읍성
만인의총 맞은편에는 최근 일부 복원한 남원
읍성(사적 제298호)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에 남원에는 지방 행정중심인 소경(小京)이
자리하였으며, 그에 따른 성곽이 있었다. 중
국식 읍성을 본떠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규모
는 3.4km 가량의 둘레에 높이 4m 정도였
으며, 사방에 문을 두었다. 이 성안에서 남
원의 백성들은 나라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일부복원된남원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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