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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왼쪽부터­윗정재마을­당산,­
                             만복사지­보물32호­당간지주,­보물30호­3층석탑,­보물43호­석불입상


                    장 복음산으로 가지 않고, 남원역방향으로                 만복사는 김시습의 소설 ‘금오신화’에 실린 「
                    길을 잡아도 좋다. 남원역을 지나자마자 왼                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이기도 하다. 「만복사
                    편 마을 어귀로 들어가는 조그만 길이 보인                저포기」  스토리는 이렇다. 남원에 사는 가
                    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칠승마을이다.                난한 노총각인 양생이 왜구의 침입 때 정절
                    반달 형세의 땅 모양이 마치 어미개가 일곱                을 지키다가 죽은 처녀의 환신(幻身-환상 속
                    마리의 새끼 강아지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에서만 가능한 사람)과 만나 사랑을 나누었
                    모습을 띠고 있고, 그 일곱 꼭지 자리가 정승              다. 그러다가 처녀가 떠난 뒤에도 양생은 그
                    을 낳을 명당 터라 하여 칠승마을이라 하였                사랑을 잊지 못해 장가를 가지 않고, 산속에
                    다고 전한다. 여유롭게 마을 안길을 걷다보                서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 이야기다. 조선중
                    면 금세 만복사지가 나온다.                        기까지도 번창하던 만복사는 안타깝게도 정
                                                           유재란(1597)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찬란했던 만복사, 정유재란때 불타                    버리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옛 영화를 말해
                                                           주고 있다.
                    만복사지(萬福寺址)는 남원시 왕정동에 위                 [현재 만복사지에 남아있는 국가지정문화재
                    치한 사적 제349호로, 고려 문종(1046~              로는 오층석탑(보물 제30호)과 불상좌대(보
                    1083)때 창건한 만복사가 자리했던 터다.               물 제31호), 당간지주(보물 제32호), 석불
                    조선시대  숙종  때에  간행된  [용성지(龍城             입상(보물 제43호)이 있다]

                    誌)]의  내용으로  추정컨대,  당시  만복사는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법당들과 그 안에는  향교ㆍ왕정동 가로지르는 광치천

                    높이 약 10m의 불상이 있었으며, 수백 명
                    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사찰이었다. 또한,                만복사지에서 남원시내 방향으로 300m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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