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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표               광한루원


                                  남원시 전통문화유산의 역사적 사건들을 연대기 순으로 살펴봅니다.
                                  이번 호는 최근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 승격을 추진 중인 광한루와 광한루원 편입니다.

      남원연대기
                                                               1419
                                  광한루원은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樓苑)이다.                조선 세종 원년, 황희 정승은 남원 유배 당시, 광통루(廣通樓,
                                  아름다운 누각과 정원은                 지금의 광한루)라는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겼다.
                                  신선의 세계와 이상향을
                                                               1444
                                  떠올리게 한다. 보물로
                                  지정된 광한루는 춘향과
                                                               세종 26년, 전라도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의 아름다움을
                                  이도령의 사랑 이야기로
                                                               월궁(月宮)에 비유하여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것에서
                                  유명하지만 황희, 정인지,
                                                               광한루라 부르게 되었다.
                                  정철 등 쟁쟁한 역사 속

                                  인물들과도 인연이 있다는                1461
                                  사실. 최근엔 풍수지리적,
                                  조경적 가치가 두드러져                 세조 7년 남원부사 장의국은 누원 일원에 요천강의 맑은 물을
                                  국보 승격도 추진 중이다.               끌어다가 은하수를 상징하는 호수를 만들었다.
            since 1419
                                  세계 속 한문화의 중심으로
                                  우뚝 설 광한루원의 역사와

                                  숨은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황희 정승과
                                  광한루원 이야기


                                  워낙 강직했던 성격 탓에 태
                                  종의 충녕대군(세종) 세자 책
                                  봉에 끝까지 반대했던 황희
                                  정승은 결국 그의 어머니와
                                  친인척이 살고 있던 남원으로              1582
                                  유배된다. 그는 6대조 조부
                                                               전라도관찰사 정철이 못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황감평이 지어 놓았던 요천강변 조그만 서재 터에 “광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섬을 만들어
               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생활하니 이것이 광한루의 시
                                                               섬 사이를 사다리꼴 다리로 연결하였다. 이로써 광한루원은
               초가 된다. 지금도 광한루 후문 쪽에는 그의 유배 당
                                                               천체와 우주를 상징하는 누원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시 생활 모습을 재현한 초당이 남아 있다. 훗날 세종의
               부름으로 다시 영의정에 오른 황희는 조선 최대의 치                    1597
               세를 이끌게 된다.
               <필자 미상, 황희 영정, 70×79cm, 서울역사박물관>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왜적들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다.

               규모 ―
               수량/면적 78,166m 2                                 1626
               부속건물 ―
     16        광한루, 오작교, 완월정, 춘향사당, 월매집, 춘향관                   인조 4년, 남원부사 신감이 현재와 같은 규모로 광한루를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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