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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충동 행정복지센터

남원성

남원성

  • 소재지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충열길 23-14
  • 종목 : 사적 제298호
  • 시대 : 삼국시대
  • 지정일 : 1982.11.3

남원시에 있는 평지 읍성이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에 처음 쌓았으며, 1597년에는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성을 크게 다시 쌓고 수리하여 담을 높였다.
그 해 8월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왜군에게 크게 패했는데, 이때 싸우다 죽은 군인과 주민들의 무덤이 만인의총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많이 허물어져 약간의 성터 모습만 남아 있다.
돌축대의 길이는 2.4km가 넘고, 높이 약 4m에 이르며 성안에는 70여 개의 우물이 있었다.
성 안에는 남북과 동서로 직선대로가 교차하고, 그 사이에도 너비가 좁은 직선도로가 교차하여 바둑판 모양의 도로 구성을 볼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 도시가 들어서면서 성곽은 대부분 헐려 나갔으나, 시내 중심부의 도로는 지금도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어, 옛 성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 읍성으로는 매우 큰 규모를 보이는 이 읍성은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네모 반듯한 구성을 하고 있다는 점과 성을 방어하기 위한 옹성, 해자, 여장 등을 잘 갖추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남원(南原)은 백제(百濟)의 영역에서 신라(新羅)의 소경(小京)으로 발전하면서 정연한 시가지(市街地)가 형성되었고, 소경성(小京城)이 축조되었는데, 이를 지리지(地理誌)에서는 유인궤성(劉仁軌城)으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통일신라의 소경성(小京城)을 유인궤성(劉仁軌城)이라 하고 9구(區)로 정전(井田)의 유지(遺址)가 남아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실제로 지금의 남원시가(南原市街)는 도로(道路)가 방격(方格)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초기에 고쳐서 쌓아진 읍성(邑城)은 평지(平地)에 정방형(正方形)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동북에서 서남향하여 흐르는 북천(北天)과 주천(朱川)의 사이에 자리잡은 가장 전형적(典型的)인 중국식(中國式) 읍성(邑城)으로는 해자(垓子)가 있고, 동(東)·서(西)·남(南)·북(北)에 성문(城門)이 있었다.

남원성(南原城)이 크게 수축(修築)된 것은 1597년의 정유재란(丁酉再亂)때이다.
명(明)의 구원군이 이곳에 주둔(駐屯)하면서 총병(摠兵) 양원(楊元)과 삼장(參將) 낙상지(駱尙志) 등이 전라감사(全羅監司)로 하여금 수축(修築)케 하였는데, 성벽을 더욱 높이 쌓고, 성밖의 해자(垓子)를 깊이 파고 성벽(城壁) 위의 여장(女墻)을 높고 견고하게 고쳐서 왜(倭)의 공격(攻擊)에 대비하였다.

1597년 7월말 남원성(南原城)에는 명군(明軍) 3,000명과 우리 민(民)·관(官)·군(軍)이 합세하여 지키고 있었고, 왜군(倭軍)은 8월(月) 중순까지 부근에 집결하여 성을 포위하게 되었다.

우리군사들은 동문을 명(明)나라 중군 이신방(李新芳)이 맡고, 남문은 장표(蔣表), 서문은 모승선(毛承先)이 맡았으며 북문은 전라병사(全羅兵使) 이복남(李福男)이 맡아 지키었으나, 8월 16일에 이르러 전세가 불리(不利)함을 느낀 명장(明將) 양원(楊元)은 50여명의 심복부하만 거느리고 군졸로 변장하고 도망쳐 버렸다.

끝까지 싸우며 지키던 군사와 주민들은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마치었는데,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방어사(防禦使) 오응정(吳應井) 등과 명군(明軍)의 중군장(中軍將) 이신방(李新芳)·천총(千摠) 장표(蔣表)·모승선(毛承先) 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용성관(龍城館)·광한루(廣寒樓)를 비롯한 관아(官衙)와 누정(樓亭)이 모두 불타고 성안에는 즐비하던 민가(民家)가 17동(棟)만 남기고 잿더미로 변하였다.

당시 수성(守城)에 참여한 만여명의 군민(軍民)들의 넋을 안치한 만인의총(萬人義塚)은 용성관(龍城館)의 동쪽에 있었다가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성벽은 조선시대 읍성(邑城)의 가장 전형적인 구조로 아랫부분에서 위로 오르면서 성석(城石)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다.

조선시대의 읍성(邑城)으로서는 그 규모가 큰 점에 있어서나 수성(守城)을 위한 옹성(甕城)·적대(敵臺)·해자(垓子)·여장(女墻)을 잘 갖추었던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자료제공 : 남원문화원)

부가 정보

남원은 신라시대에 주요 지방 도시라 할 소경(小京)으로 선정되어 이를 에워싼 성을 갖추었다.
조선초기에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성을 고쳐 전형적인 중국식 읍성을 이루었다.
규모는 2.5km 가량의 둘레에 높이 4m 정도였으며 사방에 문을 두었고 성안에는 71개의 우물과 샘이 있었다.

정유재란 때 이곳에서 민관군이 합세하여 십만 왜군의 포위 공격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국 성은 함락되고 거의 만명에 달하는 성안의 주민과 관군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전투중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민가 17채만 남았다 하니 당시의 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시련과 좌절을 넘어선 선조의 꿋꿋한 기상을 간직했던 남원성은 동학혁명 때 또 다시 허물어져 지금은 약간의 터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