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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매면 행정복지센터

관풍리

사매면 마을소개 지도 권풍리 위치

본래 남원군(南原郡) 매내면(梅內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관촌리(官村里), 세동리(細洞里), 풍촌리(豊村里), 상신리(上新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관촌과 풍촌의 이름을 따서 관풍리(官豊里)라하고 사매면(巳梅面)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1일 남원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남원시 사매면 관풍리가 되었다. 관풍리에는 풍촌(豊村), 관촌(官村), 세동(細洞) 등이 있다.

관풍리 풍촌(豊村)마을

본래 남원군(南原郡) 매내면(梅內面) 풍촌리(豊村里) 지역으로 덕궁동(德宮洞) 또는 풍촌이라 했고 1914 년 행정구역통폐합때 관촌리(官村里), 세동리(細洞里), 풍촌리(豊村里), 상신리(上新里)의 각 일부가 병합되 관촌과 풍촌의 이름을 따서 관풍리(官豊里)라 하고 관풍리에 편입되었다.
원래 원씨가 입주 하였다는데 1619년 함창 김씨의 김성립(金成立)이 택지를 이곳에 선정하여 그 어머니와 함께 거주하게 된 것이 오늘날 그 자손들이 번창하였다.

풍촌(豊村)마을의 본래 이름은 덕궁동(德宮洞)이었는데 풍촌(豊村)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풍자(豊)를 마을 이름의 앞자로 쓰게 된 이유는 옛날 부자와 벼슬자리에 오른 인재들이 대대로 끊이지 않아 이웃 마을에 선망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부족함이 없이 풍요하게 생활하여 온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이 마을은 77년 대통령 하사금으로 마을 공동 정미소를 개설하였으며 마을 앞 소하천을 개수하여 홍수 피해를 예방하는 등 미맥위주의 근대적 농업경영이나 축산업등 농외소득을 높여 주민 협동으로 풍요한 농촌건설의 열매를 거두고 있다.

지리적 위치
  • 면소재지로부터 남동쪽 2k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시내에서 북쪽으로 11k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리 세(면적)
  • 총면적이 222.9ha로 사매면 전체의 6.7%를 차지하고, 가구는 38호로 사매면 전체의 4%이고, 인구는 87명(남 44명, 여 43명)으로 사매면 전체의 5%이다.
지 형
  • 계룡산 앞에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조그마한 매내천이 있어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마을 뒤에는 낮은 야산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해발 150m이다.
주요산업 및 토산물
  • 주로 논농사 위주이며, 일부 시설채소(오이), 서양란, 축산업 등을 하고 있다.
교통 및 통신
  • 시내버스 노선이 대신까지 농어촌도로로 연결되어 1일 5회 운행하고 있다.
관풍리 관촌(官村)마을

본본래 남원군(南原郡) 매내면(梅內面) 관촌리(官村里) 지역으로 거북명당이 있다 해서 구(龜)터 또는 관촌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관촌리(官村里), 세동리(細洞里), 풍촌리(豊村里), 상신리(上新里)의 각 일부가 병합되어 관촌과 풍촌의 이름을 따서 관풍리(官豊里)라 하고 관풍리에 편입되었다.
관촌(官村)마을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50년경(효종때) 광산 김씨가 영농을 목적으로 처음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후 함양 오씨, 전주 이씨가 이주하여 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뒤 계룡산(鷄龍山) 깊숙한 골짜기에 옛날 넓직한 절터가 있다하여 주춧돌인 듯한 돌과 북편산 능선의 '장지밭(밭이름)'에는 향교터가 있었다하여 옛기와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다. 계룡산록에 위치한 마을로써 산세가 좋아 면내에서도 제일 좋은 터라고 일컬어 오고 있으며 옛날 흰 학이 날아와 숲에서 살기 시작한 후부터 농사가 잘되어 부자와 벼슬에 오른 사람이 많았다하여 일명 구터(舊址)라고도 하며 관리가 많이 배출된 터라하여 관촌(官村)이라하여 왔다.
산록에 위치하고 있어 비교적 높은지대에 속하여 토질이 점질토로 같은 면내에 생산된 쌀이라도 찰지고 밥맛이 좋은 것은 물론, 소출도 많아 비교적 부유한 마을이며 호수는 적으나 부락민의 협동심이 높아 마을 환경 개선 및 생산 기반 시설이 잘되어 있다.
신라때 대읍(大邑)터였다는 전설이 있고 일찍이 만석의 수세를 거두어 드린 이교항(李敎恒), 이동기(李東器) 양인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하게 늘어섰던 집터가 있다.

지리적 위치
  • 면소재지로부터 남동쪽 3k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시내에서 북쪽으로 12km지점에 있다.
리 세(면적)
  • 총면적이 55.9ha로 사매면 전체의 1.7%를 차지하고, 가구는 12호로 사매면 전체의 1%이고, 인구는 27명(남 16명, 여 11명)으로 사매면 전체의 2%이다.
지 형
  • 계룡산 품안에 다정스럽게 마을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낮은 구릉지대로 마을 주변이 낮은 야산으로 형성되어 있고 마을 앞으로 소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해발 180m이다.
주요산업 및 토산물
  • 주로 논농사가 위주이며 일부 축산업과 과수를 하고 있다.
교통 및 통신
  • 시내버스 노선이 대신까지 농어촌도로로 연결되어 1일 5회 운행하고 있다.
관풍리 세동(細洞)마을

본래 남원군(南原郡) 매내면(梅內面) 세동리(細洞里) 지역으로 세골 또는 세동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관촌리(官村里), 세동리(細洞里), 풍촌리(豊村里), 상신리(上新里)의 각 일부가 병합되어 관촌과 풍촌의 이름을 따서 관풍리(官豊里)라 하고 관풍리에 편입되었다. 1550년경(명종 때) 원주 원씨가 영농을 목적으로 정착하였다.
그후 1680년경 밀양 박씨가 이주하여 왔는데 원씨는 이거해 가고 매안방 방청이 이곳에 있었다. 1914년 이전 사동방과 매안방이 있었을 당시 매안방의 방청이 지금의 정돌쇠가 살고있는 집이었다.
방청은 세금을 거두어 드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 마을을 세동(稅洞)이라고도 하였으며 그후 각 성씨들이 이주 정착하면서 세금의 세(稅)자 대신 음이 같은 가늘세(細)자로 바꾸어 세동(細洞)이라 하였다.

지리적 위치
  • 사매면 소재지에서 2k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리 세(면적)
  • 총면적은 57.3ha로 사매면 전체의 1.7%를 차지하고, 가구는 103호로 사매면 전체의 11%이고, 인구는 148명(남 87명, 여 61명)으로 사매면 전체의 8%이다.
지 형
  • 국도 또는 기간도로에서 잘 보이지 않는 구릉지대이며 산림 전체가 노송이 우거져 있고 마을 앞으로 매내천이 흐르고 있으며 해발 160m이다.
교통 및 통신
  • 전주 ~ 남원간 국도 17호 4차선 도로가 좌측으로 통하고 마을에서 오리정휴게소까지 군도가 잘 정비되어 있다.
관광·문화·체육
  • 오리정 건너편 국도변(4차선)에 휴게소가 있어 많은 관광객이 쉬어가곤 한다.
  • 춘향과 이도령이 단장의 이별 사연과 함께 이별이 못내서러워 발버둥쳐 신발자욱이 남았다는 200여평의 버선밭, 그 위에 세워져 있는 춘향전등 마치 춘향전의 한토막이 이 마을에 보존 되는 듯한 느낌이다. 또한 기묘 명현의 한사람이던 문민공 김일손과 시산군에 봉한 이정숙의 기단(杞壇)이 오리정 북편 기슭에 있다.
  • 이 마을에 건립되어 있는 매계(梅溪)서원은 조선조 정종 5년 상신마을에 설립하여 8현을 봉향(奉亨)하다가 순조 을해년에 기지의 저습으로 지금의 오수면 둔기리로 이건하여 덕계(德溪)로 개칭하여 있다가 고종 무진년에 철폐 되었던 것을 남원 유림이 1992년 관풍리 794-6번지에 건립하여 매계서원으로 환원하였다.
요앙시설
  • 정신요양원 성일병원이 관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