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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매면 행정복지센터

대신리

사매면 마을소개 지도 대신리 위치

본래 남원군(南原郡) 매내면(梅內面) 대산리(大山里) 지역으로 큰 산이 많다 하여 고산동 또는 대산(大山)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대산리(大山里)와 상신리(上新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대산과 상신의 이름을 따서 대신리(大新里)라 하고 사매면(巳梅面)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1일 남원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가 되었다. 대신리에는 대산(大山), 상신(上新) 등이 있다.

대신리 상신(上新)마을

본래 남원군(南原郡) 매내면(梅內面) 상신(上新) 지역으로 여의터(如意), 매안골 또는 상신(上新)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대산리(大山里)와 상신리(上新里)의 일부가 병합되어 대산과 상신의 이름을 따서 대신리(大新里)라 하고 대신리에 편입되었다. 1590년경 탐진 최씨, 협계 태씨, 청주 한씨가 살아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현재는 협계 태씨 1호만 있고 나중에 들어온 세종대왕의 증손인 전주 이씨 이정숙의 자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전주 이씨의 정착 동기는 이정숙이 조광조(趙光朝)가 기묘사화(조선 중종 14년, 1519)에 몰려 난을 피하여 외숙 청주 한씨 직장공 한응(韓應)을 찾아와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후 선조대왕때인 1593년 신설(伸雪)을 베풀어 벼슬과 문민공(文愍公) 시호(諡號)를 내려 현 매계서원(梅溪書院)에 향배(亨配)하였다.
자연마을 상신, 대산 2개 마을로 법정리 대신리라 불려지고 있으며 원매안(元梅岸), 여의(如意)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매안은 당초부터 구내방(丘內坊)이었는데 약 300년전 공자(孔子)의 이름자가 '구(丘)'라하여 지명으로 사용하는 것은 불손하다하여 마을앞 동산에 매화락지(梅花落地) 명당이 있어 매내방(梅內坊)이라 했다가 매안방(梅岸)으로 바뀌었다.
또 여의 터는 마을 뒤 계룡산이 용의 형상을 가지고 여의주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러다가 1910년 이후 사매면의 윗쪽마을이라는 뜻에서 상신(上新)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19년 4월4일 당시 덕과면장 이석기(李奭器)는 식목일 행사를 이용, 덕과면민을 총동원하고 전려국도(全麗國道) 보수로 위장하여 매안방민을 동원, 매안헌병분병소를 협공하고 남원 장날을 기해 이 마을 출신 의사들의 주도로 전국을 뒤흔들었다. 그외 이광수 선생의 임실군 오수역, 보통학교생의 역전 만세 운동이 있으며 상해임정(上海臨政)자금 모금의 전북도 책임자도 이 마을 출신이다.
3·1만세운동 이후 이 마을에 야학회를 조직하여 야학을 통한 독립운동이 해방까지 이어졌으며 이 야학회에서 불리워졌던 13도가(十三道歌)가 있다.(전설편 참조)

지리적 위치
  • 사매면 소재지로부터 남동쪽 3km지점 계룡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리 세(면적)
  • 총면적이 107ha로 사매면 전체의 3.2%를 차지하고, 가구는 46호로 사매면 전체의 5%이고, 인구는 106명(남 56명, 여 50명)으로 사매면 전체의 5%이다.
지 형
  • 계룡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조그마한 대신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평지이고 마을 앞과 뒤의 소나무숲이 울창하고 해발 170m이다.
주요산업 및 토산물
  • 미맥위주의 논농사가 주업이며, 고구마, 오디뽕, 생강등을 생산하고 있다.
교통 및 통신
  • 시내버스 노선이 대신까지 농어촌도로로 연결되어 1일 5회 운행하고 있다.
대신리 대산(大山)마을

본래 남원군(南原郡) 매내면(梅內面) 대산리(大山里) 지역으로 큰 산이 많다 하여 고산동 또는 대산(大山)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대산리(大山里)와 상신리(上新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대산과 상신의 이름을 따서 대신리(大新里)라 하고 대신리에 편입되었다.
처음 1456년 세조 병자년에 진주 형씨 근(瑾)이 단종 복위운동때 순절한 사육신과 함께 절개를 지키다 죽게 되자 그의 아들 계선(繼善)이 그 난을 피하여 주생면 영천리에서 이곳 대산마을로 피하여 정착하였다. 현재 진주 형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원래 마을 이름은 고산골이라 칭했으며 1910년 합방후 대산(大山)으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해오는 설에 따르면 최초 추씨(秋氏)가 현재의 마을보다 남쪽으로 터를 잡아 60여년간 거주하다 다른 곳으로 이주 하고난 후 형씨가 현재 마을 보다 북쪽에 들어 와 정착했는데 큰 홍수를 만나 지금의 새샘골에 자리를 옮겨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지리적 위치
  • 사매면 소재지로부터 남동쪽으로 3km지점으로 보절면과 광치동의 경계이다.
리 세(면적)
  • 총면적이 70ha로 사매면 전체의 2.2%를 차지하고, 가구는 31호로 사매면 전체의 3%이고, 인구는 63명(남 35명, 여 28명)으로 사매면 전체의 3%이다.
지 형
  • 마을 뒤가 온통 높은 산으로 마을 옆은 대신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으며 구릉지대이다. 대신천의 범람으로 인근 논농사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였으나 이곳 역시 1970년대말 말끔히 정리되었고, 해발 180m다.
주요산업 및 토산물
  • 미맥위주의 논농사가 주업이며 일부 축산업과 과수업, 고구마를 생산하고 있다.
교통 및 통신
  • 전주~남원간 4차선 국도가 서북쪽에 있고, 시내버스 노선은 남원~대신간 시내버스가 대산마을의 농어촌도로와 연결되어 있으며 1일 5회 왕복 운행 된다.
관광·문화·체육
  • 효열시설물로 형두원 효자비와 형국봉 효자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