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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야기 | 수지면 호곡리 내호곡마을
나눔의 철학이 숨쉬는 ‘몽심재’의 마을
남원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구례 방향으로 보라면 몽심재는 강보에 폭 안겨있는 아이
달린다. 60번 지방도와 합류하여 낮은 고 이다. 호곡마을은 박 씨 문중이 사는 안쪽
개를 넘으니 이내 저수지가 눈에 든다. 수 마을인 내호곡과 집안의 노비들이나 그 밖
송저수지로 들어 온 수지천이 마을 앞 쪽으 의 사람들이 거주하던 외호곡으로 나뉜다.
로 흘러들어 양쪽에 넓은 들판을 만든다. 몽심재는 350년 전, 연당(蓮堂) 박동식(
호곡마을은 예로부터 영호남간의 물적, 인 朴東式, 1763∼1830년)에 의해 건립되었
적 교류가 활발한 지역이어서 유, 불, 선에 는데, 박동식은 14대조 선대인 송암 박문
정통한 시인묵객과 한량들의 왕래가 잦았 수의 ‘隔洞柳眠元亮夢 登山薇吐伯夷心(마
던 곳으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
호곡마을 건너편, 구례와 남원의 경계선에 명이 꿈꾸고 있는 듯하고, 산에 오르니 고
위치한 견두산에 얽힌 재미난 사연이 있다. 사리는 백이숙제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
견두산의 옛 이름은 호두산(虎頭山)인데, 나)란 시구를 받아 첫째 줄 끝 글자인 몽(
이름값을 하느라고 산 주변이며 마을에 호 夢)자와 둘째 줄 끝 글자인 심(心)자를 따서
랑이가 출몰하는 일이 잦았다. 이에 조정에 그 이름을 몽심재라고 지었다. 박문수는 정
탄원을 올리니 조정에서는 호랑이 기를 누 몽주, 이색과 더불어 고려의 ‘삼로(三老)’
르기 위하여 호두산은 견두산으로 바꾸고 라 불리었는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왕
호곡마을의 호(虎)자도 좋을 호(好)자로 바 으로 즉위하는 것을 반대해 두문동에 은거
꾸어 부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이 하였으며 그 집안 식구들을 호곡리에 내려
름이 바뀐 경위에 대해서는 일제 강점기 우 와 살게 했으니 그 때부터 남원이 죽산박씨
리 얼 말살정책의 영향 때문이었다는 이견 의 본향이 된 것이다.
도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0호인 몽심재
견두산 아래 내호곡리가 아이를 감싸는 강 의 중심은 사랑채이다. 돌담을 쌓듯 단을
높이 세운 뒤 집을 올렸는데 이는 앞산에 가
로막힌 전망을 밝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랑
몽심재솟을대문(왼쪽)과사랑채전경(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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