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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마루(왼쪽)와'ㄷ'자형안채(오른쪽)
는 도인(道人)이 많이 배출되었다. 호곡마
을의 죽산박씨 중, 원불교에 출가한 교무(
敎務)가 40여 명에 이르며, 54살의 후계자
에게 오체투지로 절을 올려 평화로운 세습
이 이루어지도록 한 전설의 인물인 박장식
옹 또한 이 곳 출신이다.
몽심재에 들어서면 사랑채며 행랑채의 아
기자기함에 한 번 놀라고 좁은 마당위에 ㄷ
자 형태로 들어선 안채 때문에 또 한 번 놀
란다. 만석꾼의 살림살이라고 하기엔 소박
채 바로 뒤에 있는 안채도 경사가 있는 땅 하기 이를 데 없는 행색이다. 대문 옆에 붙
에 지어 올려 전체적으로 앞으로 흘러내리 어 있는 두 칸짜리 행랑채와 좁다란 마당
는 내리막길에 건물을 세운 듯하다. 대문 끝에 우뚝 서 있는 다섯 칸짜리 사랑채, 그
옆에 지어져 있는 행랑채는 정자가 덧대어 리고 중문을 지나 들어서면 이내 안채가 보
져 있어 시선을 끈다. 문간채 옆의 이 정자 인다. 이것이 호남지역을 호령하던 만석꾼
를 ‘요요정(樂樂亭)’이라 부르는데 요요정 집의 전부다. 조선시대 대갓집에서 중요시
은 하인들의 휴식을 위한 전용 공간이다. 했던 두 가지 일이 있었다. 하나는 조상에
조선시대 정자는 양반들만의 공간이었으므 대한 제사를 충실히 지내는 일이고, 다른
로 노비나 종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공간 하나는 찾아오는 손님을 정성스럽게 대접
이었다. 그러나 몽심재의 주인은 날씨가 더 하는 일이었다. 특히 접빈객(接賓客) 풍습
울 때 하인들도 마음 편히 쉴 수 있도록 문 은 타인에 대한 적선(積善)을 의미함과 동
간채 옆에 요요정을 만들었다. 시에 그 행위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대문 앞마당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커다란 자연스럽게 수집하는 효과도 있었다. 박 씨
바윗돌도 눈에 들어온다. 복바위로 불리기 가문은 사회 환원을 많이 하기로 유명하여
도 하는 이 바위 덕분인지 이곳에 터를 잡 앞 산 건너편의 초등학교도 이 가문에서 세
은 이래, 죽산 박 씨 일가는 3대째부터 만 운 것이라 한다. 나눔과 위로의 마음이 절
석꾼이 되었다. 우백호보다 좌청룡이 훨씬 실해지는 요즘 그 마음을 몸소 실천한 몽심
길고 튼튼해 풍수상 ‘청룡장(靑龍藏)’ 형국 재와 몽심재를 감싸 안은 호곡마을의 정신
을 갖춘 몽심재 터에서 몸과 마음을 수행하 이 더욱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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