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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과면 행정복지센터

만도리

본래 남원의 적과면(迪果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으로 만적리(晩迪里)와 도촌리(島村里), 작소리(鵲巢里)의 각 일부와 고절면(高節面)의 다산리(茶山里) 일부를 병합하여 만적과 도촌의 이름을 따서 만도리라 하고 덕과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1일 남원시·군이 통합되어 남원시 덕과면 만도리가 되었다. 만도리에는 만동과 도촌마을이 있다.

만도리 도촌(島村)마을

본래 남원의 적과면(迪果面) 만적리(晩迪里)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으로 만적리(晩迪里)와 도촌리(島村里), 작소리(鵲巢里)의 각 일부와 고절면(高節面)의 다산리(茶山里) 일부가 병합되어 만적과 도촌의 이름을 따서 만도리라 하고 만도리에 편입되었다.히 알수 없으나 1443년경 금녕 김씨가 정착한 후 1676년 안동 권씨가 순창으로부터 이주하여 먼저 정착한 금녕 김씨와 융합하여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도촌마을은 서기 1424년(세종 6년) 이웃마을 만동으로 이사해 온 소석지의 둘째아들 선이 분가하여 정착한 곳으로 홍수가 나면 마을의 서편이 냇물처럼 범람하여 멀리 높은곳에서 보면 마치 바다의 섬처럼 보인다하여 '섬촌'이라 했는데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섬도(島)자를 넣어 도촌이라 부르게 되었다.히 알수 없으나 1443년경 금녕 김씨가 정착한 후 1676년 안동 권씨가 순창으로부터 이주하여 먼저 정착한 금녕 김씨와 융합하여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후 구한말까지는 마을 명칭과 같이 섬처럼 별로 발전이 없다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붐을 타고 발전하기 시작하여 1976년에는 자립마을로 승격되는 등 이제는 완전히 잘사는 마을로 탈바꿈 하였다.히 알수 없으나 1443년경 금녕 김씨가 정착한 후 1676년 안동 권씨가 순창으로부터 이주하여 먼저 정착한 금녕 김씨와 융합하여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총가구수는 18호며 농가 17호, 비농가 1호이며, 인구수로는 39명 (남자 21명, 여자 18명)이 살고 있다. 성씨별로는 소씨 14가구, 정씨 2가구, 이씨 2가구, 기타 4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지리적 위치
  • 덕과면 소재지로부터 동남쪽으로 4㎞지점에 위치하고 동편으로는 보절 소재지가 1.5㎞, 북쪽으로는 팔공산, 남쪽으로는 계룡산이 둘러있고 서쪽으로는 작소마을과 비촌마을 및 호암천이 흐르고 있어 기름진 옥토가 주변에 위치하고 연결되어 있다.
리 세(면적)
  • 전답 총면적 37.6ha로써 덕과면 전체면적의 5%를 차지하고 있다.
지 형
  • 해발 410∼500m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경지면적이 좁다.
주요산업 및 토산물
  • 미맥위주의 농업을 주로 하고 있어 100% 농림업이다.
교통 및 통신
  • 국도 17호선에서 시의 군도 14호선을 따라 약 5㎞정도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보절면과 연결하고 있으며 교통소통이 비교적 원활하다. 농가 전체에 전화가 설치되어 있다.
만도리 만동(晩洞)마을

본래 남원의 적과면(迪果面), 만적리(晩迪里)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으로 만적리(晩迪里)와 도촌리(島村里), 작소리(鵲巢里)의 각 일부와 고절면(高節面)의 다산리(茶山里) 일부가 병합되어 만적과 도촌의 이름을 따서 만도리라 하여 만도리에 편입되었다.
만동마을은 1400년경(조선 태종)에 진주 소씨의 소석지(蘇錫智)가 처음 이곳을 개척하고 정착하였는데 이때 사람들은 북쪽 1㎞지점 소씨가 터 잡은 곳이 천황봉과 계룡산의 정기가 맺힌곳이라 하여 좋은 명당자리라 칭찬해 마지않았다.
소석지가 처음 터를 잡을 때 마을 이름을 만적(晩迪)이라 하였으나 1555년(명종 10년) 이성춘(홍주 이씨)이 자포실(子抱谷)에 살다가 이웃 산수동으로 이주한 후 만적과 산수동을 합쳐 만동(晩洞)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580년전에 형성되었으나 완전한 마을로 형성하기는 1700년경이었다. 그 당시 약 80여호의 주민들이 쌀과 보리농사를 주로하는 원시적인 농업을 해 왔으나 1974년 새마을 운동이 시작된 후 살기 좋은 마을로 바뀌었으며 지금은 농로, 소하천 등을 보수하여 가뭄에도 물걱정이 없고 농기계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부자마을로 발전하였다. 이 마을의 주업은 농업이나 부업으로는 연초, 대마재배 등으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총 농가수로는 30호며 농가 29호 비농가 1호이며, 인구수로는 71명 (남자 36명, 여자 35명)이 살고 있으며, 성씨별로는 소씨 18가구, 이씨 2가구, 신씨 6가구, 기타 1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지리적 위치
  • 덕과면 소재지의 동남쪽 5.4㎞지점에 위치하고 동편으로 보절면 소재지가 2㎞가 떨어져 있고 북쪽으로는 팔공산 남쪽으로는 계룡산으로 둘러싸인 안동네와 계룡산골 깊숙히 들어있는 산수동 동네로 연결되어 있다.
리 세(면적)
  • 전답 총면적은 78.7ha로써 덕과면 전체의 10%를 차지하고 있는 비교적 작은 마을이다.
지 형
  • 해발 410m의 팔공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며 아홉 구(九)자형 지형이다. 해발 150m인 앞산 계룡산에는 송이버섯도 자생하고 있어 농가소득에 도움이 되고 있다.
주요산업 및 토산물
  • 미맥위주의 농업을 주로 하고 있어 100% 농림업이며 토산물로는 대마를 재배하여 질 좋은 삼베를 짜 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교통 및 통신
  • 국도 17호선에서 시의 군도 14호선을 따라 약 4㎞정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괴양선이 마을 앞을 통과하여 보절면 괴양리를 지나 남원시내와 연결하고 있다. 전체 농가에 전화가 설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