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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 30년(1597)에는 남원부사 최염이 주변 험준하다. 또한, 섬진강으로 흘러가는 계곡
일곱 고을의 군사를 징발하여 수축하였고, 과 우물이 99개가 있어 전쟁과 같은 비상 상
숙종(肅宗) 때에도 수축공사가 있었다고 전 황에서 대피하여 적에 맞설 수 있는 천혜의
해지고 있다. 현재, 홍예문과 옹성(甕城), 그 요새였던 것이다. 성을 지키는 책임은 남원
리고 산중턱의 성벽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부사(南原府使)와 별장(別將)이었고, 성 안
데, 일부는 복원 중에 있다. 에는 군수품을 비롯하여 곡식 등 전쟁에 대비
산성 바로 아래 주차장에서 성벽을 따라 오 한 각종 저장고가 있었다.
른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ㄱ자형으로 꺾인 정유재란 때에는 남원도호부 관내 ‘운봉, 장
곳에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문인 ‘홍 수, 임실, 구례, 곡성, 담양, 옥과’ 등의 양곡
예문’이 있다. 교룡산성에는 동서남북으로 4 을 거두어 교룡산성에 보관했다고 전한다.
개의 출입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동문에 해 이처럼 교룡산성은 남원 백성들의 최후의 보
당하는 홍예문만 남아 있다. 루였던 것이다. 홍예문을 지나 돌계단을 딛
고 300m 가량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남원도호부 최후의 보루 천혜요새 선국사라는 고찰을 만난다.
문 양 측면을 장대석으로 3단으로 쌓은 뒤, 신라 신문왕 5년(685)에 창건했다고 전해오
그 위 평평한 곳에 아홉 개의 돌을 아치형으 는데, 창건 당시 절 근처에 용천이라는 샘이
로 짜 맞추어 놓았는데, 보기 드문 산성 석축 있어서 절 이름을 용천사라 불렸다고 한다.
형태이다. 한 눈에 딱 봐도 그 모양새가 예사 그 후 교룡산성을 쌓은 뒤 절의 성격이 호국
롭지 않다. 이 문에서 서로 대치해가면서 총 도량으로 바뀌면서 이름도 선국사로 바뀌었
칼을 겨누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아름답기 을 것으로 추정한다. 선국사가 한창 부흥했
까지 하다. 성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 던 시절에는 승려들만 300여명이 있었다고
에 산성 중수비와 교룡산성을 지켰던 역대 무 전하는데, 지금은 대웅전과 칠성각ㆍ요사채
관 별장들의 기적비(紀績碑)들이 줄 지어 서 ㆍ보제루 만 남아 있어 쇠락한 느낌이다.
있다. 교룡산성의 역사를 말없이 말해주며
서있다. 선국사와 최제우,
그렇다면, 왜 굳이 교룡산에 산성을 만들어 그리고 동학농민운동
무엇을 방위하려 했을까? 그런데, 선국사는 묘하게도 동학과 매우 밀
교룡산은 평지에 위치한 남원에서도 북쪽에 접한 관계가 있다.
밀덕봉과 복덕봉이 있어 그 산세가 가파르고 때는 1862년. 농민항쟁 때 동학을 창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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