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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절면 행정복지센터

보절면 전설

갈치와 칠송정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년 전에 가난한 선비 한사람이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가세가 빈곤하여 심산대곡에서 산채와 갈근(칡)으로 살았다고 한다.
엄동설한 에도 매일 갈근을 채취하여 부모님을 봉양하고 살았는데 이곳 원님께서 선비의 효심이 가상히 여겨 친히 찾아 상을 내리시고 선비와 담소를 했는데 원님께서 이곳 마을 이름을 갈치라 명하고 (칡뿌리가 많고 재기 있다하여) 선비는 원님이 쉬어가시는 곳을 대원각이라 하였다.
이런 일이 있고난 뒤 안씨(安氏) 형제가 소나무 7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칠송골이라 부르고 이곳에 효자 열부 비각을 세웠다.

금계마을

옛날 광주안씨 문중에 효행이 지극한 사람이 살았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부친을 명당에 안장하고 싶어서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이 금계마을을 발견하고 마을 뒷산에 영구를 운반하여 무덤을 만들고 그 옆에 움막을 짓고 10년을 보살폈다.
그래도 아버지를 남겨둔채 떠나갈 수 없다고 하여 효심으로 가족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사해 왔다.
이것이 마을 형성의 첫 동기이며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옥녀봉 -금계

이 마을에는 옥녀봉이 있는데 옥녀봉 아래에 자리 잡은 금계마을은 풍수설에 의하면 옥녀가 베를 짠다는 직금(織錦)이 있고 그리하여 마을이름도 베 짜는데 필요한 바디와 같다하여 바디 성(成) 마을 촌(村)해서 성촌(成村)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옥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을 놓던 자리가 마을이다.
북을 바쁘게 움직이던 곳이 마을 복판이기에 중앙에 집을 지으면 집이 쓰러진다 하여 집을 짓지 아니하고 중앙을 경계로 하여 현재 상하(上下)촌으로 마을이 분리되어 있다.
또 우물을 파면 베틀을 놓을 수 없다 하여 우물을 파지 못하고 지낸다고 한다.

꾸리바위- 금계

이 마을에는 옥녀가 베를 짜고 있는데 중이 뒤에서 나타나자 옥녀가 뒤를 돌아보는 형상의 바위가 있다.
마을 뒤 옥녀봉 밑에는 한 개의 큰 바위가 칼로 멘 듯이 4조각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바위를 "꾸리바위"라 한다.

다뫼 호복동

이 마을은 원래 호복동인데 그것은 조선조 중엽 임란을 피하여 방황하다가 이 마을에 정착 하였는데 차(茶)나무가 마을 앞에 우거졌다하여 "다뫼"라 하기도 하고 호랑이가 먹이를 찾아 복병하고 있는 자리라하여 "호복동"이라고도 한다.

다산 숲

마을 입구에는 숲거리가 있는데 숲밑에 자연석으로 휴식처를 만들어 지금도 안식처가 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을 지나가던 도사가 그늘 밑에 쉬다가 깜빡 잠이 들었은데 개미가 공격하게 되자 도술로 개미를 멸종시켜 버렸다.

섶골

이 마을은 유명한 도승이 천황봉의 명당을 찾아 이곳저곳으로 유람하다가 허기진 몸으로 곳곳을 돌아다녔으나 결국은 사망하게 되자 본래는 승려를 뜻하는 중(僧)고개(峴)라 하였으나 그후 중신(中薪)으로 변하여 전래하고 있다.
그런데 그 후 이 마을이 누에가 섶에 올라 집을 지은 형국이라 하여 처음에는 섶골이라 칭하다가 다시 중신(中新)으로 개칭하여 부르게 되었다.

파작동

이곳에는 천황봉(天皇峰) 줄기따라 12개의 명당이 있다고 하는데 흥덕장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고 살았다.
그런데 만행산의 주봉인 천황봉은 여러 갈래가 뻗어 그 중의 하나가 본 마을을 이루는 것으로 마치 파도처럼 되어 있다하여 파작동으로 불리다가 그 후 신파리(新波理)로 개칭되었다.

누른대

마을 앞산이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거미가 먹이를 잡기 위해 거미줄을 치고 있는 모양이라 하여 "지주설망"이라 부르는 유명한 명당이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 연유하여 처음에는 "느린데"라고 부르던 것이 와전되어 "누른대"라 부르게 되었다.
이것을 한자로 쓴 것이 안누른대(內黃), 바깥누른대(外黃)라 한다.

톳바위

이 마을은 풍수설에 의하면 마을이 낚시하는 늙은이가 수양하는 형국이라 한다.
그래서 톳바위가 있는데 이러한 명당에 터를 잡은 최씨들은 잘 살았는데 어느 날 스님이 이곳으로 시주를 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시주를 주기는 커녕 이곳으로 시주온 중에게 마을 사람들이 박대하였다.
이에 화가 난 스님은 마을 뒷 산맥을 끊어 낚시줄을 끊게 하고 마을 앞에 큰 물레방아를 놓게 하여 고기들이 놀라서 도망가게 하였다.
그때부터 최씨들이 망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효자정문 - 벌촌

조선조말 고종 때에 이 마을에는 참봉 박만석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빈곤함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봉양함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겨울인데도 죽순을 구해다 드리고 여름철에는 얼음물을 드리기 위하여 서편 황산에 굴을 파고 빙고(氷庫)를 만들어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하는 등 살아생전에 극진히 봉양하였다.
부친이 사경에 이르자, 손가락 3개를 베어 수혈을 하면서 효성을 다하였다.
이것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가 죽은 후에 가선대부 참판 겸 동지 의금부사를 증직하였으며 효자 정문이 세워졌다.

돌탑 - 사촌

마을 입구 도로를 가로질러 흐르는 냇가에 아침에 돌탑을 쌓아 놓으면 밤에 무너져 내리고 다시 쌓아도 밤만 되면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왜 무너져 내리는 지는 마을 사람들도 모른다고 한다.
다만 옛날 도사가 마을 지형을 보고 탑을 쌓으면 마을이 부귀영화를 누릴거라는 말 때문에 쌓으려고 했다는 전설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큰 하천둑을 만들어서 조탑거리의 형상을 찾아 볼수 없다.

자라바위와 뱀머리 바위 - 도촌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는 도룡천 위로 올라가 보면, 그 형상이 꼭 자라와 뱀모양을 하고 있은 바위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자라가 냇가의 물을 마시려고 목을 내밀고 있으며, 뱀이 긴 몸을 휘어 감고 머리는 자라를 향하여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뱀이 자라알을 먹기 위해 자라를 공격하는 형상이라고 한다.
이 곳 주변에는 당산무덤, 명당자리가 한 곳에 같이 위치하고 있다.

용포 - 용평

마을에서 보현사를 들어가는 도중에 위치한 용포에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는데, 이 폭포에서 용이 몸을 씻고 승천하였다고 하여 그 후 [용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마을 이름이 용등(龍登)의 유래가 되었다.
이곳은 물이 너무 맑고 깨끗하여 여름철에는 발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있다.

탕건바위 - 사촌

사촌마을 입구 냇가 옆에 있은 탕건바위는 마치 옛날 할아버지들이 쓰고 다니는 탕건과 똑같이 생겼다.
원래 할아버지 당산에 있었는데, 마을사람들이 마을 입구 냇가 옆에 갖다 놓아다가 70년대 새마을 사업이 한창일때 회관앞으로 옮겨 놓았으며, 둘레 270㎝이며 높이는 90㎝이다.
특이한 전설은 없고 탕건처럼 생겼다고하여 탕건바위라고 한다.

배바위

사촌마을의 할아버지 당산터에 있는 바위로 두 개가 있다.
좌측것은 높이 56㎝이며 둘레 700㎝이다.
우측은 높이 65㎝이고 둘레는 740㎝이다.
배모양 같아 배바위라고 불리어 졌다.

바람바위

칠상동 능선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로 바람불때 마을에서 보면 마치 그 바위가 흔들 흔들 거리는 것처럼 보여 바람바위라고 불리운다.
200년전 백응노라는 촌장이 100여명의 장정을 동원하여 이 바위를 없애려 하였으나 청천벽력이 일고 천지를 흔드는 진동이 일어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전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