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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면 행정복지센터

덕치리

본래 남원군(南原郡) 상원천면(上元川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회덕리(會德里)와 노치리(蘆峙里) 일부를 병합하여 회덕과 노치의 이름을 따서 덕치리(德峙里)라 하고 주천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남원시 군이 통합되어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가 되었다. 덕치리에는 회덕, 노치 등이 있다.

덕치리 회덕(會德)마을

본래 남원군(南原郡) 상원천면(上元川面) 회덕리(會德里) 지역으로 모데기, 무더기 또는 회덕(會德)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회덕리(會德里)와 노치리(蘆峙里) 일부가 병합되어 회덕과 노치의 이름을 따서 덕치리(德峙里)라 하고 덕치리에 편입되었다. 임진왜란때 밀양 박씨(密陽朴氏)가 피난하여 살게된 것이 마을을 이룬 시초라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까지 마을은 전형적인 산골마을로 평안하고 번창하였으나 전쟁이 일어난 후 불행히도 집한채 남김없이 불타 버렸다. 그러다 지리산 공비가 완전히 소탕된 뒤 다시 마을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는 마을 이름을 "모데기"라 불렀다. 그 뜻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덕두산(德頭山) 덕산(德山) 덕음산(德陰山)의 덕(德)을 한곳에 모아 이 마을을 이루었다는 뜻으로 "모데기"(會德)이라 하였으니 모데기는 "모덕"이 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로 인해 옛날 괴질이 유행할 때 이 마을만은 안전하였다고 전한다. 산악지대로 평야가 적고 교통이 불편하며 마을 주위에는 큰 연못이 새군데나 있다. 이 연못의 유래는 당시 풍수지리설로 지리산의 맥줄기가 일본까지 뻗쳐 있어 일본이 흥성하므로 일본으로 가는 지리산의 맥을 끊기 위하여 속칭 가자골 앞, 번데기, 안터의 세곳에 큰 연못을 팠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까투봉은 서울 남산과 마주보는 화산이므로 그 화를 막기위하여 산봉우리에 소금 수십가마와 물을 묻어 액을 면하게 했다는 전설도 있다. 회덕의 구룡정에서는 해마다 구룡계가 열리고 있다. 회덕마을은 평야보다 임야가 많기 때문에 억새풀을 이용하여 지붕을 만들었으며 현재는 두 가구만이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1986년 주천에서 지리산 정령치를 통하는 도로(국가지원지방도60호선)가 개통되므로 본격적인 문명의 혜택을 보게되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늦게 개발된 지역이지만 기름진 넓은 농지와 풍부한 산림자원, 근면성실한 주민의 힘이 삼위일체되어 부촌을 이루고 있다. 특히 출타하여 성공한 예도 많아 어디서나 근면은 소부(小富)를 이룬다는 말을 실감케하고 있다.

지리적 위치
  • 주천면사무소 기점 육모정을 지나 고기리삼거리에서 운봉읍으로 가는 지방도 60호선을 따라 운봉읍과의 경계에서 1.1km 지점에 위치하며 마을 우측으로는 노치마을, 앞으로는 운봉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리 세(면적)
  • 1997년 6월말 총면적은 305.5ha로 주천면 전체면적의 6%를 차지하며, 전답별 비율은 전이 9.1ha로 농경지의 20%, 답은 35.6ha로 농경지의 80%이다. 임야는 250.3ha로 총면적 82%, 기타가 8.6ha로 총면적의 0.3%이다. 2010년 기준 가구는 44호로 주천면 전체의 4%이고 인구는 83명(남 39명, 여 44명)으로 주천면 전체의 3% 정도이다.
지 형
  • 해발 550m의 산간지대로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산세가 가파른 덕음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마을옆으로는 정령치에서 발원하는 맑은 물이 구룡폭포를 이루어 원천천으로 이어지고 있다. 마을앞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고랭지대이기 때문에 다른지역에 비해 농사철이 빠르다.
주요산업 및 토산물
  • 벼농사가 주산업이며 한우축산농가가 7농가 있으며 담배 등 밭작물 재배농가도 다수 있다.
기 타
  • 민속자료 35호인 덕치리 초가가 소재하고 있으며 지리산 숲길 구간 중간에 위치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덕치리 노치(蘆峙)마을

본래 남원군(南原郡) 상원천면(上元川面) 노치리(蘆峙里)지역으로 갈재 또는 노치(蘆峙)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회덕리(會德里)와 노치리(蘆峙里) 일부가 병합되어 회덕과 노치의 이름을 따서 덕치리(德峙里)라 하고 덕치리에 편입되었다.
조선조 초에 경주 정씨(慶州鄭氏)가 머물러 살고 이어 경주 이씨(慶州李氏)가 들어와 살게 되어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후 여러 성씨들이 차례로 들어와 살던 중 한국전쟁 후 마을이 완전히 불타버렸다. 마을사람들은 재 아래 (주천면은 서부중산가지 동부고냉지로 지역을 나누는데 이르기를 서부는 치하(峙下:재아래), 동부는 치상(峙上)이라 칭하고 있다)로 모두 옮겨지고 이곳은 황무지가 되었다가 지리산 공비가 완전히 소탕된 후 그 자리로 다시 들어와 살게 되었다.
마을의 본래 이름은 갈재이다. 노치마을은 해발 500m의 고랭지로서 서쪽에는 구룡폭포와 구룡치(九龍峙)가 있으며 뒤에는 덕음산이 있고 지리산의 관문이라고 말하는 고리봉과 만복대를 바라보고 있으며 구룡치를 끼고 있는데 이들 산줄기의 높은 곳이 갈대로 덮여 있어 갈재라하고 노치(蘆峙)라 쓴 것이다.
마을에는 옛날에 민씨(閔氏)라는 거지가 살았는데 그는 짚신을 삼아 팔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민씨가 죽어 눈 덮인 산을 헤매어 시체를 매장하려는데 신기하게도 시체의 관이 알맞게 들어갈 만큼 눈이 녹아 있는 곳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곳에 장사를 지냈는데 바로 그 자리가 용은 용인데 주인이 없다는 황룡무주(黃龍無主)의 명당이었다다. 이 묘를 쓴 뒤 그후손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한일합방때 자결한 민영환(閔泳煥)도 그 후손중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한다. 그런데 그 묘를 호화롭게 석물을 세우고 보수를 한 뒤로는 자손들이 뜻밖에도 나쁜일을 당해서 다시 석물들을 없앴더니 화가 없어졌다고 한다.
한국전쟁시 전소되었던 마을이 꾸준한 복구사업과 새마을사업으로 현대 농촌마을로 발전하였으며 주산업은 농업이며 고추, 마늘 등 전작물도 많이 재배하고 있다. 현재는 젊은이들은 거의 없고 노년층이 마을인구 대부분을차지하고 있다.

지리적 위치
  • 주천면사무소에서 육모정을 지나 고기리삼거리로 가는 지방도 6호선을 따라 운봉읍을 들어가는 입구에서 1km지점 위치, 북동쪽은 운봉읍과 남쪽은 고기리, 서쪽은 회덕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리 세(면적)
  • 1997년 6월말 총면적은 306.6ha로 주천면 전체면적의 6%를 차지하며, 전답별 비율은 전이 5.3ha로 농경지의 14%, 답은 31.5ha로 농경지의 86%이다. 임야는 271.2ha로 총면적 89%,기타가 8.8ha로 총면적의 3%이다. 2010년 기준 가구는 32호로 주천면 전체의 2.8%이고 인구는 62명(남 33명, 여 29명)으로 주천면 전체의 2.4%정도 이다.
지 형
  • 해발 500m의 산간지대로 사방이 임야로 둘려싸여 있으며 마을앞으로는 평야가 펼쳐져 있고 임야를 개간한 밭이 많다.
주요산업 및 토산물
  • 벼농사가 주산업이며 한우사육농가와 담배, 고랭지 채소 등 밭작물을 재배하는 농가가 다수 있다.
종교시설
  • 운천교회
기 타
  • 지리산 숲길 및 백두대간의 발원지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래전부터 마을 뒤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노치당산제를 현재까지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