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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에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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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WON CITY

판소리

멋과 풍류를 아는 남원

판소리 일러스트

예로부터 남원 사람들은 북을 치고, 활을 쏘며 지리산에 오르는 풍류를 즐겼다. 이를 남원의 3대 풍류라고 말한다.

이러한 남원의 멋과 풍류는 오래된 역사와 지리적 여건 그리고 신라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거문고 음악을 전수시킨 사실에서 시작되었다.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기능이 활을 쏘게 했고, 행정의 중심지 로써 많은 학자와 문학적 요소가 생성되고, 지리산은 생활에 필요한 자원을 공급해주는 훌륭한 삶의 공간이 되어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남원은 환경과 생활에서 오는 문화 그대로를 풍류로, 풍류는 멋을 승화해 내었다.

그래서 활 쏘기(弓道)의 도(道) 간직하고 있어 충(忠)이 살아 있고, 지리산과 더불어 생성 되어온 문화가 예(藝)로 살아 판소리를 만들어내 남원의 3대 풍류가 형성된 근본이 되어 가히 이것을 모르면 남원사람이 아니라 했을 만큼 훌륭한 문화 적유산과 전통 속에서 맛과 풍류를 즐기며 사는 사람들이었다.이로 보면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남원은 우리 음악의 창작과 전수에 가장 좋은 환경을 갖춘 곳이었기에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우리 음악의 성지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01송흥록 (宋興祿 1800 ~)

송흥록 사진

송흥록은 남원 운봉 비전리 출신으로 순조 · 헌종 · 철종 등 3대에 걸친 명창이다.
가왕(歌王)으로 불리는 그는 역대의 판소리 명창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때까지는 없었던 진양 장단 (24박1장단의 가장 느린속도)를 도입하여 다양한 변화를 줌으 로써 판소리 발전에도 크게 기여 하였다.

장단과 속도의 화려한 변화를 자유 자재로 구사하였으며, 모든 판 소리에 뛰어났으나 그중에서도 변강쇠 타령,춘향가, 적벽가를 잘했는데 춘향가 중의 옥중가 에 나오는 귀곡성이 특히 유명하다. 동편제 판소리를 확립하여 동편제 소리의 시조로 손꼽힌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여산폭포(廬山瀑布), 호풍환우(呼風喚雨), 천변만화(千變萬化)라 하 였으며, 신재효는 [광대가]에서 "송선달 흥록이는 타성주옥(唾成珠玉), 방약무인(傍若無人) 화란춘성(化蘭春城), 만화방창(萬化方暢) 시중천자(時中天子) 이태백(李太白)" 이라 할 정도 로 변화 무쌍한 판소리 기교를 가졌다.

한편 송광록(宋光祿)은 순조·헌종 때의 명창으로, 형흥록의 고수(故水)로 여러 해 동안 수행하다가 소리를 연마하여 흥록과 견줄만한 대명창이 되었다. 그 소리는 아들 우룡과 손자 만갑,증손자 기덕에게 전해져서 판소리 동편제의 큰 맥 을 형성하였다.

02김정문(金正文:1887~1935)

김정문 사진

남원 주천면에서 살았으며, 처음 외숙인 유성준(劉成俊)에게 판소리를 배우다가 송만갑의고수로 있으면서 소리를 익혀 제자가 되었다. 동편제 소리와 함께 서편제도 배워,독창적인 소리를 하였다.

그는 타고난 재주는 적으나 끊임없는 노력으로 마침내 명창이 되었다. 특히 [흥부가],[심청가],[적벽가]를 잘하였다. 남원에 있을때 많은 명창들을 길렀는데, 그 가운데 박녹주, 김준섭, 강도근, 박초월, 김여란, 김소희 등은 당대 명창으로 추앙 받고 있다. 현재 음반으로 [춘향가]몇 대목과 단가 '홍문연가(鴻門宴歌)'가 남아있다.

03박초월(朴初月:1916~1982)

박초월 사진

한국 현대판소리사에서 불멸의 족적을 남긴 인물로, 남원운봉에서 출생하여 김정문, 송만갑 에게 배웠고, 임방울, 정광수에게도 소리 공부를 하였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좋은 목소리에 성량도 풍부하여 일찍부터 이름을 날렸다. 1932년에 전주에서 열린 전국남녀명창대회에서 1등을 한 뒤 여러 음반회사와 [흥보가], [심청가], [춘향가]등을 취입하였다.

1955년에 박귀 희와 함께 대한민국예술원 (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을 창립하여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고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보유자로, 1973년에는 [수궁가]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조통달, 남해성, 전정민 등이 대를 잇고 있다

04강도근(姜道根:1917~1996)

강도근 사진

남원 향교동에서 태어나 15세 때 김정문에게 [흥보가]와 [춘향가]등 토막소리를 배웠고, 19 39년에 서울로 올라가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송만갑, 정정렬, 이동백등에게 2년간 배웠다. 다시 구례 박봉채에게 소리를 배운 후 하동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 이진영에게 [심청가}를 배 웠다. 일제 말 창극단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면서 공연을 다니다가, 해방 이후 남원으로 돌 아와 농사를 지으면서 남원시립국악원에서 오로지 공연과 후진 양성에 혼신을 다하다 소리꾼 으로서의 한평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동편제 소리의 마지막 적자였다.

소리에 대한 치열한 집 념과 60여년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던 소리 연마의 과정, 그리고 자기 예술에 대한 자존심과 예술 이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고집스런 심성, 농사지으며 소리하는 일을 천직으로 알았던 농투산이 소리꾼, 우리에게 전통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깨우쳐주던 남원의 그 고집스런 소리 꾼이었다.

동편제판소리의 전통을 가장 잘 간직한 소리꾼으로 1988년에는 [흥보가]로 중요무 형문화재가 되었으며 대표적인 제자로 안숙선, 박윤초, 강정숙, 전인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