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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면 행정복지센터

금지면 전설

환봉사

환봉사는 금지면 방촌리에 있는데 1956년에 창건하였다. 환봉사에는 영양(穎陽) 천씨 시조 천만리(千萬里)를 주벽으로 삼고 그 아들 천상외 2현을 봉안하고 있다.

천만리(千萬里)

천만리는 조선 선조때 중국인으로서 우리나라에 귀화한 분으로 고향은 중국 영양(穎陽)으로 오늘날 천씨들은 그곳을 본관으로 삼아 온다. 그는 아호를 사암(思庵)이라 하고 일찍이 무예에 능하여 특히 활쏘기의 명수였다. 무과를 장원으로 급제하여 진무사가 되었고,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영량사(領糧使)가 되어 종군하고 그 아들 천 상(千 祥)도 함께 참전하였다. 그리하여 평양과 곽산(郭山)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동래(東萊)까지 남하하여 여러차례 승전하였다. 정유재란(1597년)때에도 울산(蔚山)싸움에 공을 세우고 싸움이 끝난 뒤에도 조선에 영주하기를 희망하므로 조정에서는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하고 시호(諡號)를 충장공(忠壯公)이라 하였다. 그는 남원의 환봉사 외에도 고성(固城) 호암사(虎巖祠), 청도(淸道)의 황강사(皇岡祠)에도 배향되어 있다.

천 상 (千 祥)

천상은 아호를 오헌(吾軒)이라 하였으며 임진왜란때 아버지 화산군(花山君)을 따라 우리나라에 건너와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지냈고 벼슬이 오위 도총관(五衛 都總管)에 이르렀다.

노씨제각의 명당

지금으로부터 약 220여년전 고룡촌 뒷산이 명당이라 알려져 풍천 노씨와 밀양 박씨간에 서로 이 명당을 차지하려고 옥신각신 하였으나 끝내 합의가 되지 않았다.양쪽 대표가 한사람씩 나와 화로를 들고 산을 한바퀴식 돌되 먼저 돌아오는 편이 명당을 차지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풍촌 노씨 종족이 승리하여 오늘날 노씨들의 묘가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지금도 고롱마을에는 풍천노씨 제각이 있다.

꾸지나무

방촌마을은 옛부터 선달(先達) 대부(大夫) 등의 벼슬을 한는 분들이 많이 정착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한 도사(대사)가 주지로 부임 하였는데 벼슬한 분들의 압력에 못이겨 주지를 못하게 되자 이를 괘심이 여겨 보복조치를 취하기 위하여 주민들을 설득시켜 꾸지나무를 베어 버리면 마을이 부흥케 된다고 하여 주민들이 이나무를 모두 베어 버렸다. 그 이후로 벼슬하던 분들이 하나 둘 떨어지면서 고관 대작이 없어졌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매화낙지

매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매화낙지라 형국이라 한다. 이런 연유로 마을 이름을 매촌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매화나무가 어느지점에 있었으며 매화꽃이 어느지점에 떨어졌는지 지금도 풍수지리학자들이 가끔식 매화낙지 명당을 찾기 위해 많은 사람이 드나들고 있지만 아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어리숲

금평마을에는 옛날 마을 서편에 꽉찬 숲이 있고 물이 맑아 마을 이름을 어리숲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1920년 대홍수로 마을 뒤로 흐르는 택촌천이 범람하여 어리숲이 없어진 뒤로 비가 올려고 하면 숲이 없어진 곳에서 귀신 우는 소리가 들려 온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천장군 묘소

방촌리에 위치한 환봉(環琫:고리봉)이라는 산줄기에 천장군묘라는 무덤이 있는데 그 무덤의 주인공은 천만리(千萬里)라 하는 분이다. 천씨는 본래 영양(穎陽) 천씨 단본이다. 영양은 중국 노나라의 지명인데 영양천씨 세보에는 그 시조는 명나라 초기의 중신 천암(千巖)이라 하는 분으로, 그 후손은 대대로 이곳 영양에 살았다. 천만리는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천씨들의 중시조로 아호(雅號)를 사암(思庵)이라 하였다. 일찍이 중국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명나라 조정의 무신으로 있다가 선조(宣祖)25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취하의 영양사 및 총독장으로 있어 그의 아들 천상(千祥)과 천희(千禧)와 함께 싸움에 참전하여 군량수송 및 그 보급에 만전을 기하여 평양 및 곽산 등지에서 아군이 크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정유재란(1597) 때에는 양호(楊鎬), 마귀(麻貴)등과 함께 세부자가 다시 조선에 나와 직산(稷山).울산(蔚山)등 여러 곳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명군이 철수할 때 그대로 머물어 조선에 귀하하니 조정에서 그를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또한 훗일에 충장공(忠壯公)이라 시호(諡號)하였다. 숙종때 조정에서 그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대보단을 설치하여 이에 봉안하였고 순조때는 고성군 호암서원에 봉안하고 헌종때에는 청도군의 황강서원에 각각 봉안하였으며, 고종때에는 문경군의 노양각, 진주의 만첨각, 안동의 동산서원에 각각 봉안하였으며 고종 33년 (1896)에는 이곳 금지면에 환봉사를 세워 그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휘하에서 전쟁에 참가 했던 천장군은 천사했다고 한다.풍수지리에 능한 이여송 장군이 이곳 고리봉 기슭에 명당을 잡아 안장했는데 이 무덤자리를 풍수지리학에서는 무자 천손지지(無子 千孫之地) 라고 했는데 '아들은 없는데 많은 자손들이 태어나는 묘자리'가 된다. 그러고 보면 중국에서 나온 천장군이 이곳 조선 땅에 천씨의 손을 퍼뜨린 바로 시조가 되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이곳 환봉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천장군묘의 지형은 아무리 추운 겨울날에도 이곳 무덤 주위에 이르면 마치 따스한 안방에 오는것만 같아 그렇게 세차게 불어오는 눈보라 모진 바람도 잔잔해 지고 고리봉을 향에 등산길에 올라 이곳에 다달으면 쉬어가지 않을수 없단다. 이 곳 환보의 산세가 험하지 않다면 더욱 개발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