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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면 행정복지센터

아영면전설

베틀바위
  • 아영면 아곡리에 베틀바위 또는 機岩臺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 기암대는 일명 옥녀직금(玉女織錦)또는 검도암(劍道岩)이라고 한다.
  • 바위의 넓이는 약 5m쯤 되는데 이 바위의 북쪽에 높이 20m쯤 되는 날카로운 또 하나의 바위가 솟아 있는데 깎아 세운 듯한 이 모습이 마치 칼과 같아서 검도암이라고 한다.
    베틀바위에는 석굴이 있는데 30여명 정도 들어가서 놀 수 있는 만치 꽤 넓어 옛날 선녀들이 이 석굴에 들어가 베틀을 고여 놓고 베짜기를 하였다고 한다.
  • 특히 이곳이 신라와 백제가 국경으로 싸움을 격렬하게 했던 아막산성(阿莫山城)이 이곳이기도 하다.
    일설에 의하면 아들을 못 낳은 여자가 바위 위에서 머리를 빗고 내려오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아영면유래

율동마을
  • 아영면 율동마을은 지세가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이 드는 마을로써알맞기에 마을이름을 야동(夜洞)이라 호칭하다가 경주김씨들이 이주해오자 경주의 옛이름을 따서 월성(月城)이라 호칭하기도 했다.
  • 그후 밤나무로 소득을 올리게 되니 밤골이라고 부르다가 이것을 한문으로 표기하게 되니 율동(栗洞)으로 부르게 되었다.
개암주마을
  • 이 마을은 옥천 조씨가 처음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곳을 선정할 때 풍수설에 의하여 이곳이 개미(蟻)형국을 닮았다고하여 이름을 '개미주'라 하였는데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에 어음이 변하여 '개암지' 또는 '개암주'로 호칭하다가 후에 이것을 한자로 바꾸게 되자 의지(蟻池)라고 표기하게 되었다.
외지마을
  • 외지마을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명산으로 북쪽에 유아가 어머니를 받들어 모신다는 유아봉모(乳兒奉母)의 형국이 있는데 이가 곧 모산(母山)이며 어머니를 모시는 여러 유아 중의 아기자리가 이 마을에 해당된다고 믿고 마을 이름을 속칭 '밧진애기'라 하였는데 '밧진애기'는 밖에 있는 아기라는 뜻이라 한다.
봉대마을
  • 봉대마을은 원래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유명한데 마을이 번창할 무렵 하촌, 중촌, 상촌, 임곡 등 4개 마을로 형성하였으나 지금은 중촌과 숲실만 남았다.
    봉대(蓬臺)는 원래 중촌의 속명인 쑥대를 한문으로 쑥봉(蓬)자를 넣어 봉대로 표기했는데 풍수설에 따라 새봉(鳳)자를 바꾸어 봉대(鳳臺)로 고쳤는데 1914년 다시 이것을 봉대(奉臺)라 하였고 1941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쓰기에 편리하도록 "받들 봉", "큰 대"로 고쳐 봉대(奉大)로 하였다고 한다.
일대마을
  • 일대마을은 아영면의 곡창이라 할 수 있는 일대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고 수많은 골짜기에서 흘러 나오는 풍부한 수자원 무성한 산림자원이 있어 사람이 살기가 좋은 곳이라하여 일대(逸臺)라 칭하여 오다가 햇볕을 많이 받는다고하여 다시 마을 이름을 일대(日臺)로 부르게 되었다.
부동마을
  • 부동마을은 마을 중앙에 개울이 흐르고 그곳에 두 개의 천연 교량이 있다.
    뒷산에서 내려다보면 가마솥(釜)과 같이 생겼고, 윗다리(上橋)는 솥의 뒷이마, 밑다리는 솥의 앞이마처럼 보인다고 하여 '가마마을' 또는 줄여서 '가마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다가 '가마말'이 변형되어 '가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 이것을 한자로 쓰게 되니 釜洞이라 표기한 것이다.
내인마을
  • 이 마을은 고려 말에 이성계가 적장 아지 발도를 무찌를 때 아지발도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팔랑치 바람을 끌어들여 활을 쏘아서 적장과 왜구를 무찌르게 되었다는 뜻에서 인풍리(引風里)라고 하였다.
  • 또 풍수설에 의하면 이 마을이 형국이 비단같으며 비단은 바람에 펄럭이여 더 빛나는 것이라 생각하여 인풍이라 호칭했다고 하기도 한다.
오산마을
  • 1500년대 탐진최씨가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 옆산이 자라(鰲)와 같다하여 오산(鰲山) 또는 자라뫼라 불렀으며 오산은 자라뫼의 이름을 한문으로 표기한 것일뿐이다.
    그후 자라 鰲자가 표기상 번잡하므로 발음이 같은 五山으로 부르게 되었다.
    1930년 무렵 한때는 원월산(元月山)으로 불린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