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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면 행정복지센터

두락리

본래 운봉의 북하면(北下面) 지역으로 두래기, 두락(斗落)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월성리(月城里)와 의지리(蟻池里), 이동(梨洞)의 일부가 병합되어 두락리(斗落里)라 하고 남원군 아영면 편입되었다.
1995년 남원시 . 군이 통합되면서 남원시 아영면 두락리가 되었다.
두락리에는 두락, 이동 등이 있다.

두락리 두락(斗落) 마을

본래 운봉의 북하면(北下面)지역으로 두래기, 두락(斗落)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월성리(月城里)와 의지리(蟻池里), 이동(梨洞)의 일부가 병합되어 두락리(斗落里)에 편입되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수 없으나 대체로 신라시대에 경주(慶州)김씨의 씨족이 20여호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다가 모두 괴질로 죽고 한동안 폐촌이 되었다.

그후 고려중엽(1200년경) 전주(全州)이씨가 들어와 살다가 곧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이어서 경주이씨와 기타 성씨가 다시 정착하여 차차 마을이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당시는 현재의 마을 뒷산 기슭과 마을 앞의 2개의 마을로 분산되어 있었으나 조선조 철종(1849~1863)때 현 위치로 옮겼다.
이것은 그동안 괴질로 인하여 마을이 폐촌된지라 그 자리를 피해 새터를 잡은 것이라 한다.

아영면 일대가 다 그러하듯이 이곳도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와의 국경지대로 많은 전쟁을 치루어야 했고, 그때마다 젊은 남자들은 싸움터에 끌려갔다.
여자들만 농사를 지으니 연속 흉년이 들어 하늘에 기도하여 고사를 지내니 그해부터 여자들이 가꾼밭의 콩과 팥이 풍년들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마을 이름을 콩과 팥을 의미하는 두(豆)와 물을 의미하는 락(洛)을 써서 두락(豆洛)이라 지었다고 한다.

그후 다시 흉년이 둘어 뒷산에 있는 이화사(梨花寺)의 부처님께 빌었더니 도사가 강림하여 마을앞에 향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우물을 파고 마을 이름을 말두(斗)자로 고쳐 두락(斗洛)이라 부르면 재앙이 없어진다는 게시를 받아 그대로 따랐더니 과연 풍년이 들어 마을이 번창해지므로 그후로는 두락(斗洛)이라 써오게 되었다 한다.
또 일설에는 논이 많아 두래기 도는 두락이라고 한다.

지리적 위치
  • 면소재지(광평)에서 동북쪽으로 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리 세(면적)
  • 총면적은 117.2ha로 아영면 면적의 3.3%를 차지하고 있다.
    전답비율은 전 37.7ha 농경지의 52.2%, 답 34.5ha 농경지의 47.8%, 임야 31ha 총면적의 26.4 %, 기타 14ha 총면적의 12.1%이다.
    가구는 50호로 아영면 전체의 4.7%이고, 인구는 140명으로 남자 75명, 여자 65명(아영면 전체의 5.3%)이다.
지 형
  • 경상남도 함양군과 도계에 위치한 와우형국의 마을로 두락리 동쪽 두류봉 이화사의 도사의 교시로 샘을 얻으니 통정(桶井)이라했는데 이 샘이 마르면 흉년이 든다는 얘기가 전해오는데 6?25때도 갑자기 샘이 마르더니 전쟁이 끝나자 물이 다시 나왔다고 한다.
    마을주위를 산이 감싸고 있으며 논, 밭이 넓게 펼쳐져 있는 평범한 농촌이다.
    산에서 감이 많이 생산되며, 산이 밭으로 많이 개간되었고 풍천이 마을 앞을 흐르는 해발 450m이다
주요노선
  • 시 . 군도 29번선이 마을 앞 1km 지점으로 관통하고 있다.
주요산업 및 토산물
  • 고랭지 감자, 배추, 무우 등이 많이 생산되며, 축산을 겸한 과수 영농이 발달되었다.
기타
  • 마을회관 1동
  • 모정 1동
두락리 이동(梨洞) 마을

본래 운봉의 북하면(北下面)지역으로 배골, 배나무골 또는 이동(梨洞)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월성리(月城里)와 의지리(蟻池里), 이동(梨洞)의 일부가 병합되어 두락리(斗落里)에 편입되었다.

신라 경순왕(敬順王:927~935)때 나 ? 제(羅 ? 濟)국경지대인 이곳에 경주(慶州)이씨와 한씨(韓氏)가 처음 터를 잡고 점차 씨족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그후 고려 공양왕때(1390년경) 피난지로 알려져 많은 성씨들이 이주하여 들어와 마을이 확장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최초 마을이 형성될 당시 두류산(頭流山)에는 이화사(梨花寺)가 있었고 마을에도 배나무가 많이 있었으므로 이화산의 도사가 마을 이름을 '배나무골'이라고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후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배이(梨)자를 넣어 이동(梨洞)이라 하였다.

지리적 위치
  • 면소재지(광평)에서 동북쪽으로 2.3km 지점에 위치하며 경남 함양군과 도계를 접함
리 세(면적)
  • 총면적은 119.5ha로 아영면 면적의 3.3%를 차지하고 있다.
    전답비율은 전 20.6ha 농경지의 38.1%, 답 33.4ha 농경지의 61.9%, 임야 53ha 총면적의 44.3%, 기타 12.5ha 총면적의 10.6%이다.
    가구는 19호로 아영면 전체의 1.9%이고, 인구는 55명으로 남자 26명, 여자 29명(아영면 전체의 2.3%)이다.
지 형
  • 인월면 성내 마을과 인접해 있고 진양재를 넘으면 경남 함양군 백전면 오천리로 통한다.
  • 북쪽의 덕유산 정기를 타고 두류봉에서 지기가 뭉쳐 다시 남쪽으로 연비산으로 흘러 가는 중간 지맥에 터를 잡은 이곳은 풍수지리상 배형국이다.
    마을 중심부를 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이 흐르고 해발 470m이다
주요노선
  • 최근에 2차선으로 마을 진입로 2km가 아스톤 포장되었다.
주요산업 및 토산물
  • 고랭지 감자, 배추, 무우 등이 많이 생산되며, 가축사육과 과수재배를 통해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관광 문화 체육
  • 전북특별자치도 지방기념물 제10호 두락리 고분군이 있다.
기타
  • 마을회관 1동
  • 모정 1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