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전라도의 중심이 되다.
01백제시대
남원의 지리지『용성지(龍城誌)』에는 "백제시대의 남원은 온조왕(溫祚王)때에는 고룡군 (古龍郡)"으로 기록하고 있어 남원은온조 왕때 비로소 백제의 지방 군현의 하나로 `고룡(古龍)'이 되었다. 남원과 인접한 가야 지역을 신라가 평정하게 되자 남원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가 되었고, 서기 7세기의 시작과 함께 아막성(阿莫城 : 아영면)을 사이에두고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02남북국시대 - 5소경과 남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지방 제도를 개편하여 전국에 9주(州) 5소경(小京)을 설치했는데, 신문왕(685년)은 남원에 소경(南原京)을 새로 두어 동쪽에 치우친 수도를 보완하도록 조처하였다. 신라가 남원소경을 설치한 주목적은 지리 산과 섬진강 서쪽의 주요 정치 · 사회 · 문화 · 군사의 거점으로서 전라도 즉 완산주(전북)와 무진주(전남)를 통제하려는 것으로서 소경(小京)은 단순한 문화 도시뿐만 아니라 통치 차원의 군사(軍事)적 거점의 성격이 강했다. 그 면면한 전통이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발판이 되었다.
따라서 후기 신라시대에 남원은 완산주와 무진주를 관장하는 호남 제1의 도시로 성장 · 발전하며, 전라도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 면면한 전통이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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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모양관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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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목가리개·갑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