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아이콘 또는 HTTPS 확인하기
웹 브라우저의 주소 입력창에 표시된 자물쇠 아이콘과 주소 앞 https://가 있는지 체크하여
보안적용이 되어 있는지 확인하세요.

남원시청주요 누리집 한눈에 모아보기 !

남원에가면

Let's go together
NAMWON CITY

조선

정치 군사적 거점, 남원!

정치 군사적 거점 남원 사진

조선태종 13년(1413) 10월에 8도를 새로 정하며서 전국에 74개의 도호부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남원은 도호부(都護府)가 되었다. 그리하여 순창군 · 용담현 · 구례현 · 임실현 · 운봉현 · 장수현 · 무주현 · 진안현 · 곡성현 · 광양현 등1 군 9현을 관할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地理志)에는 당시 남원에 1,300호에 4,912명이 거주하였다고 적고있다. 한편, 세조 1년(1455)에는 지방 군사 조직을 일대 혁신하여, 각도의 중요한 곳에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인근의 고 을을 분속시키는 군익도 (軍翼道) 체제를 갖추면서 전주도(全州道)와 남원도(南原道)를 두었다.

세조 10년(1464)에 진관체제(鎭管體制)로 개편되면서 나주 · 장흥 · 광주 · 부안 · 순천 · 전주 등과 함께 거진(巨鎭)의 하나가 되었다. 이 때 남원진(南原鎭)에는 임실 · 장수 · 순창 · 운봉 · 옥과 · 곡성 · 구례가 속하게 되어 정치 ·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 으로 확고히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의 개편에 따라 남원부(南原府)가 되어 남원과 구례 · 운봉 · 곡성 · 순천 · 광양 ·임실 · 장수 · 진안 · 담양 · 순창 · 옥과 · 용담 · 창평 · 무주 등을 관할하는 정치적 · 군사적 중요한 거점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

남원성 싸움과 만인의 총

남원성 사진

남원성은 경상도에서 험준한 지리산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오는 중요한 관문으로 예로부터 호남의 인후지지(咽候 之地)라했다. 이러한 남원의 지리적 여건은 군사적으로 남원을 방어하는 것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관건 이었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은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키면서 공격목표를 적국(赤國) 전라도로 삼고 좌군과 수군 56,800명의 대군으로 남원성(南原城)을 침공하였다.

8월 12일에 신식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주력인 소서행 장(小西行長)의 부대가 남원성을 포위하였는데 이때고 남원성을 사수 하는 조선군 1,300여명과 명나라 병사 3,000여 명, 그리고 다수의 성내 주민등 1만여명이 혼열일체로 분전하였지만 중과부적이었다. 8월 16일에 조선군 등 성안의 사람들이 모두 전사하여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남원성 유물 사진

비록 남원성은 함락되었으나 남원성 싸움에서 큰 타격을 입고 전력을 소실한 왜군은 조(朝) ·명(明) 연합군의 저지 에 북상이 좌절되어 왜란(倭亂)이 끝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충열사(忠烈祠 )를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사적 제272호로 지정된 만인의총(萬人義塚)이다. 이 싸움에 대해 [선조실록(宣祖 實錄선조30년 8월을해)]은 " 남원 주변의 주민과 부녀자 들에 이르기까지 참전하여 용감히 싸워 많은 왜군을 죽여 충절을 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