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에 목숨 바친 남원 사람들
남원사람들의 구국(救國) 활동은 민초들이 자발적으로 호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다른지역과 유기적인 관련을 맺어애국과 민주화의 표상이 되었다.
01일제에 항거한 의병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양한규( 梁漢奎 : 1844~1907)가 의병을 일으켜 남원성에 입성, 광한루에 주둔한 일본군을 습격하여 패퇴시켰으나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후 1919년 3 · 1운동에도 이석기(李奭器)와 황찬서(黃贊西)등이 중심으로 수많은 사 람들이 참가 하여모두 19차례의 만세운동을 벌여 전북에서는 가장 많은 42명이 순절하였으며, 이 당시 남원관할인 번암면 출신인 백용성 (白龍城 : 1864~1940)은 한용운과 함께 민족대 표 33인 중 불교계대표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024.19의 기폭제 김주열열사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출신의 김주열(金朱烈)은 1960년 금지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상고에 입학하기 위해마산에 머무르다 3.15 부정선거에 항의한 시위대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된지 27일만에 최루탄이 눈에 박힌채 4월 11일 오전 12시 마산항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 올랐다.
김 주열의 참혹한 주검은 마침내 대민권 탈환운동인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기폭제가 되었다. 1960년 5월 김주열의 죽음을 추모하는 노래 [남원 땅에 잠들었네] 가 부산 도미노 레코드사에서 발매 되었는데 이는 당시 국민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김주열에 대한 추모하는 심정을 잘말 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