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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생면 행정복지센터

주생면 전설

아 이런

상동마을은 학당, 동지밑, 고랑이라고도 하고 이언(伊彦)이라고도 하는데 그 전설은 마을 입구로 들어오는 고개에서 이쪽(마을)을 보니 아! 이런! 하고 감찬사가 절로 나와 이언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동, 부동, 중동등 다른 마을들이 종속관계를 이루고 있다. 보름날에 달짚 태우기를 하는데 대나무로 어른 10여명이 들어 갈만하게 크게 지어 어른들을 동쪽에 모셔두고 달짚을 태운다. 연날리기와 비슷하게 액땜을 위해 태우는데 이것은 지금도 하고 있다. 달집을 태운후 농악도 한다. 6.25때 희생자가 없는 마을일 정도로 마을이 평화 스럽다.

욕심많은 양씨

중동에는 장산(長山)이 있는데 옛날이곳에는 유명한 양씨 한 분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채소를 놋그릇으로 재배 하였는데 하루는 스님 한분이 주인의 승낙 없이 밭을 건너 간 것을 보고 양씨는 크게 꾸짖는 것이었다. 스님은 힘에 못이겨 몇번이고 사과하고 자기 잘못의 대가로 선물을 주고 가겠다고 하면서 마을 뒤의 장산 높은 봉을 자르면 멀지않아 몇 배나 더 부유한 집안이 된다고 하니 욕심 많은 양씨는 그 말에 따라 장산과 고봉을 갈라 놓았는데 스님의 말과는 정 반대로 가산이 점차로 탕진되고 후손은 말할것도 없이 빈곤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대 바보

대지마을에는 당산나무 밑에 바위가 있었는데 이것은 정월때 금줄을 매기 위한 바위였다. 그리고 도둑바위라 하는 바위가 있는데 여기에는 두가지 전설이 내려 온다. 한가지는 중국에서 유도둑이란 장수가 병자호란때 놀고 갔던 자리라는 설이고 또 하나는 산들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장군이 칼로 내리치자 그만 산이 갈라졌다고 하는 설이다. 그리고 조대바위라 하여 중국의 황주와 같은 좋은 경치가 있다는 뜻에서 승허황주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고 옛날 절터가 있던 곳에 석불입상이 있는데 30년전에 개간을 하려고 땅을 파니까 종이 나왔다고 한다. 이 석불의 둘레는 320㎝, 높이335㎝ 이다.

세 물

소지마을에는 정자나무(둘레 460㎝)가 있는데 약 350년이 되었다. 정자나무 잎이 한꺼번에 다 피면 흉년이고 세 번에 걸쳐서 피면 풍년이라고 했다. 이것은 세물을 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나무 종류는 귀목(느티나무)이다. 소지 마을에는 또 아장사리터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마을이 생기기 전에 다른 마을이 있었는데 하인들이 잘못하면 목을 잘라 묻어 버린 터라는 설이 있고 또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 묻히는 곳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풍수설

유매마을은 중국의 지사 두사춘(杜士春)의 풍수설에 의하여 꿈에 선몽을 받은 명당으로 옥녀산발형국(玉女散髮形局)의 자리인데 이 자리에 남양방씨가 처음 정착하여 자리 잡은 곳이다. 처음에는 유촌과 매안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유촌은 누런 대나무가 무성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매안은 매화 나무가 번성하고 있어서 일컬어진 이름이다. 그래서 이름의 한자씩을 따서 유매(楡梅)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락골

낙동리를 사락골이라 부르는데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은 마을 뒷산의 옥녀봉에서 옛날부터 전해오는 옥녀라는 여인이 거문고를 타면 초장동에서는 장단을 맞추고, 유장동에서는 놀고, 노락골에서는 노래를 부르며 마을 동편에 있는 전당에서는 음식을 들며 즐겁게 놀았다는 네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왕바위

낙동리 마을 뒷산에는 안사동 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는 고려중엽 부터 장사 한 사람이 자기 머리카락으로 큰 바위를 꿰어 짊어지고 마을 앞 유장동으로 옮기던 중 머리카락이 끊어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너무나 아쉬워 바위 위에서 소변을 보았더니 바위가 즉시 두쪽으로 갈라졌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것을 왕바위 골짜기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