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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면 행정복지센터

송기리

본래 남원군(南原郡) 두동면(豆洞面) 송기리(松基里) 지역으로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소터, 솔터 또는 우동(牛洞)이라 했는데 송기리로 바뀌어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흑송면(黑松面)에 편입되었다가 1956년 7월 송동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남원시 군이 통합됨에 따라 남원시 송동면 송기리가 되었다. 송기리에는 우동(牛洞), 부동(富洞) 등이 있다. 송기리에는 1956년 흑송면과 두동면이 병합되어 송동면이 되면서 면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송기리 우동(宇洞)마을

1720년대 경주 최씨가 최초로 정착하기 시작하여 진주 강씨, 전주 이씨, 옥천 조씨, 밀양박씨, 남원 양씨 등 순으로 입주하여 현재는 15개성씨로 65호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설에 근거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지형이 와우혈로 소가 누어있는 형국이라 한다. 좌청용은 소의 머리 분분이고, 우백호는 소 꼬리 부분이며 가옥이 많이 집중되 있는 마을은 소의 배 부분에 속한다고 한다.
건너편 안산은 쇠구시라하여 구시골로 부르고 있어 송기 마을이 와우혈이란 것을 뒷받침해 준다. 와우혈은 소가 배불리 먹고 누어있는 형국이므로 평화적이고 풍요함을 상징한 것이므로 옛날부터 우동(우동)이라 했으나 지금은 집 우(宇)를 써서 우동(宇洞)으로 바뀌었다.
현재 송기는 와우터에서 나온 우동과 부동으로 분구 되었는데 이것은 일정할때 분구했다 해방후 다시 송기리로 단일화 했다가 다시 우동과 부동으로 분구했다.
우동으로 한 것은 소의 형국이라하여 우동이라 했고, 부동은 빈곤층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풍요한 마을, 부자 마을이 되라는 염원에 부(富)자를 붙어 부동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마을의 형태는 높은 산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넓은 들판도 없는 평범한 지세이다. 논은 저지대로 구레실로 옛적에는 물이 좋고 땅이 비옥해서 살기 좋은 지방이라고 했지만 저습답이 많아 농사짓기에 불편함을 느낀다. 견두산을 주봉으로 해서 그 산맥이 송동면으로 흘러들어와 명당이 많다하여 묘지가 많고 종산이 대부분이다. 때때산 벌거숭이 산이 많았으므로 일제하부터 녹화사업에 몰두했다. 근대화 산업으로 발전하면서 산림은 울창해졌으나 경제림이 없고 산을 개간하여 감나무 등 유실수를 심어 농가 소득도 높이고 산림녹화도 되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고 있다.

복습방

1) 복습방이란 공부방을 지칭한 곳이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지금은 사설학원으로 달 려가나 그 시절은 공부방 즉 복습방으로 달려간다. 각자 자습을 하는데 이해 못 할 문제는 상급생이 가르쳐 준다.
2) 복습방이 있었던 곳
① 양해도 사랑채 ② 조정훈 사랑채 ③ 이영씨집터 ④ 양보석 집

연자방아와 디딜방아

1) 1920년경까지 정미소가 없어 쌀이나 보리를 정미하려면 연자방아와 디딜방아를 이용했다. 한가족이 할 수도 있지만 디딜방아는 품앗이를 하는 것이 보통이고 연 자방아는 삯을 주어야 한다. 연자방아는 소나 말을 이용하여 돌로 연자방아를 끌 어 정미하고 디딜방아는 절구통에 벼를 넣고 발로 정구공이를 밟아 찧게 되는 데 힘이 적게 든다.
2) 연자방아와 드들방아가 있었던 곳
① 강병일 문 앞 ② 이정환 행랑채 터 ③ 박인규 마당터

사랑방

1) 사랑방에 얼킨 이야기는 참으로 많다. 부자집 머슴이 거쳐하는 곳이지만 비온날 이나 밤이면 작업장이 되기도 하고 문학의 전달 기관이기도 했다. 옛날 소설 독 서실 역할도 한다. 정보의 교환장, 벽돌림으로 노래하는 음악당 즉 판소리의 연 습장 오락실 과객의 숙소이기도 했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2) 사랑방이 있던곳
① 이정대 사랑채 ② 조정훈 사랑채 ③ 이정만 사랑채 ④ 강병래 사랑채 ⑤ 양 석기 사랑채 ⑥ 이권기 사랑채 ⑦ 최명문집 ⑧ 양승만 행락채 ⑨ 이우근 행 랑채 ⑩ 이강순 사랑채 ⑪ 이수용집 터 ⑫ 강병조 사랑채 ⑬ 이충로 사랑채 ⑭ 박종태 사랑채 ⑮ 이성근사랑체, 이영집 행랑채,양석기사랑채

리민의 날

1) 리민의 협동단결과 건전한 놀이 등 심화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매년 음력 칠월 백중날을 기하여 리민의 날 행사를 하는데 그 기금은 청년들의 희사금 및 유지의 협조를 얻는다. 주식은 물론 과일 등 촌민(참석자)을 위하여 준비하 게 된다. 장소는 흠덕정에서 시행된다.
2) 놀이 종류
① 씨름 ② 척사놀이 ③ 제기차기 ④ 노래자랑 ⑤ 줄다리기

실화와 전설

1) 도깨비 불
1915년경 송기리에 불이 났는데 노인층에서는 이것을 도깨비불이라 했다. 불이 4∼ 5일간 밤이면 갑자기 불이났다. 그런데 이 불은 처마 밑에서부터 일어났는데 물 1바기지만 부으면 즉시 번지지 않고 꺼졌다 한다. 물이 심히 나므로 부락민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불난곳을 감시하고 누구집에 불났네하고 고함지르면 그 집에 모여 물을 1바가지 뿌리면 불은 곧 꺼지고 말았다 한다. 하루저녁에 5∼6건씩 났다 한다. 하도 이상해서 이장 등이 남원읍에 가서 문복(점)을 했더니 박인규씨 집 옆에 디딜방아를 놓았기 때문이라며 스님을 불러 독경하면 된다고 했다한다. 사연인즉 샘위에 디딜방아를 놓았기 때문에 도깨비가 심술을 부리기 때문이라 했다. 곧 마을에 와서 스님을 데려다 독경을 했더니 곧 불장난이 없어졌다고한다. 90∼ 100세 이상 (고인이됨) 노인들은 목격담을 사랑방에서도 사장나무 밑에서 재미있게 이야기 한 것을 지금도 모두 기억하고 있다.

송기리 부동(富洞)마을

송기리의 자연마을로 도로를 중심으로 동쪽은 우동(宇洞), 서쪽은 부동(富洞)이다.
본 마을은 풍수지리설에 근거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송기는 와우혈이로 소가 누어있는 형국이라한다. 좌청용은 소리 머리 분분이고, 우백호는 소 꼬리 부분이며 가옥이 많이 집중되 있는 우동은 소의 배 부분에 속한다고 한다. 건너편 안산은 쇠구시라하여 구시골로 명명한 것을 바도 송기 마을이 와우혈이란 것을 뒷받침해 준다. 와우혈은 소가 배불리 먹고 누어있는 형국이므로 평화적이고 풍요함을 상징한 것이므로 옛날부터 비산비야로 피난지지로 생각하여 지금부터 약 270년전 (1720년대) 경주 최씨가 최초로 정착하기 시작하여 진주 강씨, 전주이씨, 옥천 조씨, 밀양 박씨, 남원 양씨 등 순으로 입주하여 현재는 15개 성씨로 54호가 살고 있다.
현재 송기는 와우터에서 나온 우동과 부동으로 분구 되었는데 이것은 일정하때 분구했다 해방후 다시 송기리로 단일화 했다가 다시 우동과 부동으로 분구했다. 우동으로 한 것은 소의 형국이라하여 우동이라 했고, 부동은 빈곤층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풍요한 마을, 부자 마을이 되라는 염원에 부(富)자를 붙어 부동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송기리민 윤리강령

우리 송기리민은 지리산정기 뻗어내린 양지바른 양지터에 생활터전 이루어 인 륜도덕과 전통적 기치관을 바탕으로 평화롭고 명예롭게 살아오던 조상들의 후 예로써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바르게 생활하며 조상들의 그 숭고한 정신을 계승 발전하여 현실사회를 밝게하고 정의를 구현하여 길이 후손에게 물려주고 자 다음사항을 실천하는데 노력한다.
1) 부모에게 효도하고 웃어른을 공경한다.
2) 어른을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솔선 수범 한다.
3) 나의 행동은 자녀의 거울이다, 행동으로 가르친다.
4) 근검절약을 생활화하여 날로 새롭게산다.
5) 우리는 하나다 봉사하고 양보하며 질서를 지킨다.

비 문

1) 고통정대부 공태동지처 숙부인 청주한씨 효렬비
청주한씨 부인은 14세때 공태동씨와 결혼 어린나이에도 시어머니께 효성을 다하 여 봉양하였고 22세때 남편 공태동씨가 병에 눕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멱었으니 이 어찌 열녀가 아니겠는가? 청주 한씨는효와 열을 다 했으니 만세에 빛나리 후손:공재섭
2) 유인 남평문씨 기적기
남평 문씨는 천품이 어질어 시부모를 효성으로 봉양 하였으며 그의 남편은 불행 하게도 일찍 중병에 걸려 신음 하였고 손발을 전혀 쓰지 못하여 집밖을 못나간 형편이였으므로 소대변을 항상 받아 냈고 의복의 청결을 게을리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에도 힘써 현모양처로 타의 칭송이 자자 하였다.
3) 후산 이공성로 시혜비
부하여 남을 잘 도와 준 것은 옛적부터 있는 윤리이지만 가난한 사람을 잘 도와준 사람이 이공성로를 본다. 가난한 사람을 세금 내주고 점심 굶은 학생에게 밥을 주 니 인(仁)으로 구제 하더라 이사실 작은돌에 담았으니 천추에 빛나리 후예:이권기
4) 전주이씨 효렬충 포양비
이영, 이태영 6대조비 청주한씨 및 5대조 형제효렬충에 대하여 전라도 36군 유림 들이 추천하고 예호가 명하여 짓게 하였다. 청주한씨는 시부모에게 정성을 다하여 효도하였고 남편의 3년동안의 중병에 온갓 정성을 다 했으며 5대조 형제 종근,석근은 부모의 중병에 대하여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 드려 3년동안 연명하 였고 똥을 맛보고 약을 지어 썻으며 막판에는 허벅지 다리를 오려내어 잡수시게 하였다. 그런후 3일만에 돌아가셨다. 국상이 날때는 단을 만들어 놓고 아침 저녁 으로 애도 했으며 매일 새벽에는 통곡 하였으니 그 기간이 무려 15년이나 되었다.
5) 승정원 주서 옥천조공 기적비
이름은 조병일이요 효는 춘곡이다 천품이 독후하고 의포가 비범하여 대과에 급제 하여 승정원 주서에 올랐고 언충행독 하였다 한다.

일화

주서 조춘곡은 세칭 3,000양짜리 인격자라 하였다한다. 글을 잘해서 글로 천양, 풍채가 좋아 천양, 걸음걸이의 위품이 천양해서 모두 3,000양 양반이라하여 모 두 흠모 하였다 한다. 후손:조동석

서 당

1) 조선시대의 말단사설 교육기관이라 말할수 있다. 이 서당교육을 마치고 향교 성균 관으로 진출하여 진사시나 대과에 응시하게 된다. 자격증 소지자가 한 것이 아니 라 서당에서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사설하여 교육 시키게 된다.
2) 학문을 즐긴 사람이 (춘노)가 서당에 와서 훈장과 담화하거나 옆에서 훈장을 도 와주는 것이 보통이다.
3) 교육의 과정을 보면 7세 정도에 입하여 추구 사자소학이나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 보감 교육을 거쳐 사서삼경 등 심오한 교육을 받게 된다.
4) 1년 내내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봄, 겨울철해서 약 6개월 정도 교육을 받는데 주경야독한 것이 보통이다.
5) 수업료라고 해야 쌀 5말 정도가 보통이나 쌀 5말이 없어 교육시키지 못하고 문맹 자로 만든 것이 약 98% 정도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6) 초등학교 처럼 교육과정이 짜여진 것이 아니라 학부형이나 훈장이 정하는 책을 선 택하여 교육을 받는다.
7) 한 사람의 훈장이 전체학생을 지도하게 되나 상급생이 하급생을 훈장 대신 지도하 는 것이 보통이므로 훈장의 수고를 덜어주게 된다.
8) 하루종일 훈장이 가르쳐 준 것을 외우고 석양에 강을 받는데 즉 글자를 훈장 앞에 서 외우고 새금으로 풀이하고 전체를 음으로 외워야 그날 수업을 마쳤다. 만약 외 우지 못하고 더듬으면 편대에 올려놓고 옷을 걷어 올린 다음 매를 맞게 되는데 종아리에 피멍이 들 정도로 심하게 맞게 된다.
9) 책 1권을 다 배우면 책거리라하여 떡과 한과 등을 가지고 와서 훈장님을 대접하고 학생들도 얻어 먹게 되는데 참으로 즐거운 날이 된다.
10) 봄철이면 하루씩 소풍을 하는데 점심밥을 싸가지고 경치좋은 곳에 가서 하루를 즐 긴다. 노래와 춤은 물론 한시를 지어서 서로 평가하고 최후로 훈장의 지도를 받게 된다.
11) 서당이 있었던 곳
① 지금의 회관자리 ② 이복로집 마구터 ③ 이우근집밑터 밭자리 ④ 강동구 사 랑채 ⑤ 조정후 사랑채 ⑥ 조동석집 ⑦ 이권기 창고 터
12) 역대 훈장
① 송기 강학산 : 서당에 다녀 학문깨도 읽었단 사람들은 강학산 선생님의 지 도를 안받은 사람이 거의 없다.
② 고시동 ③ 이구영 ④ 공재우 ⑤ 조진규 ⑥ 이희규 ⑦ 양순서 ⑧ 강태원

전설과 실화

1923년경 갑짜기 샘골샘물이 거멓게 변해 사람들이 먹을수가 없다고 했다. 노인들 이 문복을 해 보니 샘위에 묘를 썻기 때문이라 했다한다. 즉시 주민이 동원 금지면 묘주를 불러다 그 사연을 말하고 묘를 파냈다더니 갑자기 물이 맑아져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