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감으로 쓰인 비싸리나무
- 세전리에 비싸리골목이 있습니다 이 곳은 전국에서 가장 큰 집단 촌락이 형성된 곳이었습니다. 칠백오십여호를 가진 농촌으로 늙은 큰 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하나는 비싸리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이팝 정자나무입니다. 이 두 나무는 긴긴 세월로 원목은 말라죽어 베어졌지만 그 밑부분에서 다시 자란 나무가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이팝나무는 열매까지 열렸다고 전해지며 어른 다섯 아름이 되는 큰 나무였으나 일제 말에 말라죽었습니다. 이 나무보다 훨씬 앞에 있었던 비싸리나무는 세전 마을이 생길 때부터 있었고, 나무를 베어 낸 밑 부분에서 자란 나무가 다시 성장하여 현존하고 있어 보는 사람의 눈길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이 마을이 생긴 고려 초나 신라 말엽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나무가 자란 골목을 비싸리 골목이라 합니다. 비싸리 골목은 칠백오십여호가 모여 사는 큰 마을 이여서 서울 종로처럼 번화해 어느 쪽으로 빠져나갈지 분간을 못 했다는 곳입니다. 비싸리나무가 있는 그 옆에는 물 맞이 아주 좋은 큰 샘이 있고 샘 곶이는 거대한 돌로 짜 만들어져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비싸리 나무는 "팔뚝만하면 말라죽는 다고 한다는데 큰 나무로 성장하자 팔도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어떤 말에 의하면 고려 말기에 한 스님이 이 희귀한 큰 나무를 절에 시주하도록 하기 위해 신도를 모았습니다. 그는 마을에 와 꾀를 내기를 "비정상 적인 큰 나무가 마을 한 복판에 자라니 이 마을에는 장차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이요 특히 이 나무가 불에 타 죽게 된 얼마 후에 이 마을이 큰불로 인하여 소멸될 것이다." 라고 하여 그 나무를 베게 하였습니다. 제 일 큰 밑 부분을 전라남도 곡성의 도림사로 가져가려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구례 화엄사로 가져가려 했는데 역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순천 송광사로 운반하겠다고 하니 비로소 땅에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비싸리 나무의 가장 큰 부분은 송광사에 중간은 화엄사에 보내져 구시로 만들어져 현재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맨 윗 부분은 도림사에 남아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6·25 전쟁 때 불 타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