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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면 행정복지센터

세전리

본래 조선조에 남원부(南原府) 두동방(豆洞坊) 세전리(細田里)로서 잠전(潛田) 또는 세전(細田)이라 호칭하였다. 그러나 일제통치시대에 접어든 1914년의 행정구역통폐합에 따라 두동방과 흑송방(黑松坊)을 통합하여 남원군(南原郡) 송동면(松洞面) 세전리(細田里)가 되었다. 그후 1995년 1월 1일 남원시 군이 통합됨에 따라 남원시 송동면 세전리로 행정구역이 개편 되었다.
세전리에는 동양(東陽), 중상(中上), 신산(新山) 등 3개 마을이 있다.세전마을 유래를 살펴보면 원명(原名)은 잠밭(潛田)이다. 이 밖에도 솔뫼에서 뻗어내린 낙맥(落脈)의 형태가 마치 지네 같다 하여 오공동(蜈公洞)이라 하고 또한 노거수인 비사리나무가 마을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어 축동(杻洞)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원명은 세전(細田)보다는 잠밭(潛田)이 원명(原名)이다.잠밭(潛田)이란 명칭의 근거는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문헌적 근거는 주역(周易) 건괘(乾卦)에 근거하였다.
건괘(乾卦)의 괘사(卦辭)에서 잠용물용(潛龍勿用)이라는 잠용(潛龍)과 풍수지리설에서 나온 회룡은산(回龍隱山)외 은용(隱龍)과 실제 세전리의 지세인 잠용(潛龍)의 형국 등 삼자(三者)가 상호일치하여 부합된 명칭이다. 잠용은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물)을 말한다. 한편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다음 괘사(卦辭)에서의 현룡재전(見龍在田)은 용이 밭에 나타나 있음을 뜻한 것이다. 용(龍)이 드디어 세상에 나타남은 바로 왕권(王權)의 권좌인 왕위(王位)에 오른 것을 의미한다. 이 두 괘사에서 잠자(潛字)와 전자(田字)를 취하여 잠밭(潛田)이라 명칭한 것이다. 즉 때를 기다린 용이 때가 오면 세상에 나타나 마침내 용비어천(龍飛御天) 하여 왕위(王位)의 권좌에 오른다는 것이므로 앞으로 세전 마을에서 백의정승이 나온다는 말이 바로 여기에 근거한 결(訣)이다.
또한 세전을 축동(杻洞)이라 불렀던 동기는 이 마을 동편의 신산(新山) 마을 큰샘(大井) 거리에 8백년 이상된 노거수(老巨樹)로 비사리 나무가 있어 이를 근거로 비사리 골목이라 불렀다. 이 노거수를 근거로 신산(新山)은 신축(新杻), 중상(中上)은 중축(中杻), 동양(東陽)은 동축(東杻)이라 마을을 호칭하였다.이 비사리 나무의 역사적 고증을 살펴 보면 조선(朝鮮) 경종(景宗) 4년(1724) 갑진(甲辰)년에 태풍으로 인하여 이 비사리 나무가 태풍에 못이겨 넘어졌다. 이것을 크게 세 동갈이로 나누어 제일 큰 밑둥을 곡성 도림사(道林寺)로 운반하려고 하였으나 운반과정에서 땅으로 부터 움직기지 않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다시 구례 화엄사(華嚴寺)로 운반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역시 땅이 떨어지지 않아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던 고심 끝에 다시 순천 송광사(松廣寺)로 운반하려고 작정하니 그제서야 땅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송광사로 운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같이 숙명적으로 송광사에 운반된 비사리 나무는 즉시 가공하여 부처님의 고양을 마련하는 절간 주방의 [구시]로 만들었다. 가공된 [구시]는 영조(英祖) 이후 순천 송광사에서 국제(國祭)를 지낼 때마다 많은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하여 밥을 퍼 놓는 밥통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용량은 쌀 7가마 분량의 밥을 저장 할 수가 있었다. 이 비사리 구시는 현재 순천 송광사의 3대 명물중 하나로 손 꼽히고 있으며 지금도 절간 입구에 전시되어 많은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세 동갈이 중 약 50척되는 중간 도막도 구시로 가공되어 현재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 법당 뒤에 안치 되고 있으며, 끝동은 곡성 도림사로 운반되어 문간 행랑채에 안치 되었으나 6. 25전쟁기간에 소실되었다. 이 밖에도 천년이상된 노거수로서 괴목나무는 신산 앞 동산에 대정자(大亭子)가 있었으나 일제초에 고사하였다. 중상에는 이합정자(二合亭子)의 이팝나무가 있었는데 일제말기에 고사하였다. 동양에는 약 600년 수령의 서녁정자(西亭子)가 있었으나 1990년 초반에 역시 고사하였다.

지세(地勢)와 풍토(風土)

예로부터 세전마을은 백의정승(白衣政承)이 난다는 명기(名基)로 널리 알려졌다. 이는 도선국사(道詵國師)의 결(訣)언 남기록(覽奇錄) 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남원부 삼십리(三十里)에는 회룡은산형(回龍隱山形)이란 명기(名基) 가 있다. 청룡과 백호 가닥이 삼봉(三峰 거북정, 동산정, 모단)을 안고 돌았으며 안대(案垈)에는 일천호(千基)의 가구가 사는 마을 터가 있다. 혈 아래(穴下)에는 大川( 子江)이 동서로 횡류(橫流)하고 혈중(穴中)에는 四.五척(尺)이나 되는 마제석(馬蹄石 신산마을 일부를 속칭 매치석이라 함은 이 마제석이 변성된 것임)이 큰샘 거리에 말 발굽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 그러나 1972년 새마을사업 당시 길을 넓히면서 이 암석을 철거하였는데 이 명기(名基)에서는 白衣(進士) 七人 十二代 近臣 (조정에서 봉직한 신하) 三相(영의정, 좌ㆍ우의정)과 八判(여덟판서 현 장관직) 일곱 王后 그리고 일곱 충신(忠臣)이 배출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覽奇錄曰 『南原府南三十里 回龍隱山形 龍虎回抱三峰 案外千基 案下大川橫流 穴中四五尺 馬蹄石 白衣七人 三相八判 七王后 七忠臣 火土山 豊卦』
전설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곡성 태안사에서 수도를 한 후 당(唐)나라로 건너 가 일행선사(一行禪師)로부터 풍수지리설을 배운 뒤에 귀국하여 남원땅에 머물면서 산천을 두루 답산하였다. 하루는 주천면 노치(盧峙)에서 융기된 민족의 영산(靈山) 智異山의 준령인 만복대(萬福臺) 정기의 한 가닥이 견두산(犬頭山)으로 이어지고 그중 한 가닥이 다시 서쪽인 송동면 한 복판에서 원통봉(圓通峰)과 송만봉(松巒峰, 속칭 솔메이)을 치솟게 하였다. 도선국사는 이 두 준봉의 낙맥(落脈)밑에는 틀림없이 대지(大地)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말을 타고 답산에 나섰다.

세전리 북방 4㎞ 지점인 다름재에서부터 도선국사는 말을 타고 줄곧 서남방으로 주행(走行)한 낙맥(落脈)을 따라 맨 끝인 세전마을 뒤에 이르렀다. 과연 낙맥 끝에는 오십리(五十里)나 되는 광활한 들판 사이에 대강(大江)인  子江이 동서로 흐르고 있으며 마을을 중심으로 동쪽 견두산(774m)에서 부터 500∼600m 높이의 크고 작은 산들이 서쪽 고리봉까지 병풍처럼 둘러 싸고 있었다. 그리고 안대(案垈)에는 천기(千基)의 마을이 옹기종기 자리 함을 목격한 도선국사는 무릎을 치면서 [과연 여기가 천하대명당이다]고 감탄하였다. 실로 세전마을 뒤를 감싸고 있는 구능지는 마치 용의 형세와 같으며 특히 노루목 동산은 흡사 용의 머리처럼 닮??? 납짝 엎드린 용이 요천건너편의 용쏘를 향하여 헤엄쳐 가는 형국이다. 이로 인하여 요천(蓼川)에 위치한 묘단(墓壇)은 여의주(如矣珠)로 볼수 있고 강 건너 금지면 용소리(龍沼里)는 옛날에 용쏘가 있어 마치 용이 여의주(如矣珠)와 용쏘를 향하여 잠입하려는 잠용(潛龍)의 형국이어서 마을 이름을 잠밭(潛田)이라 명칭하였다.

문화유적(文化遺蹟)의 추적(推跡)

세전리 마을형성유래는 선사시대로부터 소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선사유적지인 [낡은터]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것으로 기원전 2,3세기경 부터 A,D 4,5세기경까지의 수혈식(竪穴式) 대규모집단취락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청동기시대 말엽에서부터 초기철기시대인 백제초기에 걸쳐 남하(南下)가 시작될 무렵까지의 부족단위 집단주거지다. 우리는 이 일대가 광범위한 고대문화권(古代文化圈)이 형성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분명히 이는 문헌기록이 없었던 마한(馬韓)의 부족국가인 성읍국가(城邑國家)의 도읍지로 추정된다. 그 후로 백제초기인 온조왕(溫祚王) 34년(AD16) 남하가 시작되면서부터는 옛 고룡군(古龍郡)의 군소재지였던 것도 1985년 3월 25일 전북대 발굴조사팀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이러한 발굴조사팀의 한 조사결과는 같은 시대의 유물로서 경상도지역에서 분묘형태로 출토보고된 적은 있었지만 주거지역이 동시에 발굴되기에는 이번이 전국적으로 처음이었다.

이 유적지에서 이미 발굴된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볼 때 이 유적이 초기철기시대인 마한문화권에 속함을 알수가 있다. 토기중에는 무문토기(無紋土器)로 보이는 것이 있고 드물게는 삼국토기(三國土器)인 경질토기(硬質土器)도 있었다. 출토된 토기중에는 김해토기중에서 나온 적갈색경질토기(赤褐色硬質土器)와 회색계연질토기(灰色系軟質土器)등도 출토되었다.
유물중에는 옹관(甕棺), 방추(紡錘), 어망추(漁網錘), 동검(銅劍), 석검(石劍), 석시(石矢) 유리옥등 다양한 토기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김해토기와 낙랑토기(樂浪土器)가 출토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가야(伽倻)와 낙랑(樂浪)과의 교류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발굴된 수천점의 유물은 현재 전북대 박물관 세전리 선사유적유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처럼 세전리 일대가 섬진강 중류의 평야지대에 위치하면서 마한 부족단위 성읍국가의 도읍지였다 함은 전설에서도 거이 짐작할 수가 있다. 현재 마을 앞과 선사유적지인 [낡은터]까지의 약 2㎞구간이 옛날에는 모두 집단주거지인 가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점은 처마 밑으로만 따라 가면 비 한방울 맞지 않고도 갈수 있었다고 전한다.
이조시대까지만 하여도 마을에서 호당 엽전 한 잎씩만 걷우어도 7양 5돈이나 되었음을 감안할 때 마을 규모가 750호에 달하고 있었음을 가이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여수, 순천에서 올라 온 한양행 과객들이 이 마을 남쪽의 섬진강 건너편인 동산정에서 세전을 바라 보고 [과연 여기가 서울이냐]고 크게 놀랬다고 한다.

특히 마한 54개 성읍국가의 도읍지면서 백제 고룡군의 군소재였다는 증거는 선사유적지의 북쪽에 성밑(城底) 마을이 있었으므로 성읍국가(城邑國家)의 성(城)이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동남쪽의 수지천 건너편에 직아래(稷下村)마을이 있었음은 곧 성읍국가시대의 사직단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대도평(大道坪. 한도가래)이란 명칭은 큰 대로가 있었음 의미하므로 부족국가시대의 도읍지로서 대로임이 분명하다. 그 밖에 선사유적으로는 동양마을 노루목 당산나무 아래 성혈이 있는 지석묘(支石墓)의 덮개석(蓋石)이 있고 당산 북쪽 하단 논에도 지석묘 일기(一基)가 있다. 또한 마을 동남쪽 들 가운데의 [여시바우]에도 지석묘 한 기가 남아 있다. 이밖에 지석묘 덮개석이 마을 안길의 돌 다리로 전용된 것이 10여개가 있었으나 새마을 사업에 의하여 복개되었다.

현재까지 세전마을 중앙에는 망덕(望德)거리라는 관문이 있다. 역사적인 유래를 검증하면 임진왜란 직후 계사년 5월에 왜군이 침입하였을 때 호남지역 각 고을에 남아 있는 장정들을 긁어 모아 南原에서는 처음으로 품관(品官)과 교생(校生)으로서 오장(伍長)을 삼고 입결연호(入結煙戶)로 군대를 삼았다. 연호는 다만 성밑에 사는 사람만을 뽑았다. 망덕(望德)에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로 하여금 수문장을 삼고 성(城)을 지킬 준비를 하였다. 호첩연결(壕堞烟結)마다 각 1명의 5 첩장(堞長)과 155궁가(弓家)가 있었으며 1가(家)에는 장(長)이 있고 1군(軍)에는 45 궁가(弓家)가 1책(柵)의 울타리를 얽었으니 이른바 망덕(望德)이라 호칭한다.(난중잡록(亂中雜錄) 趙慶男 著. 계사년 5월조)임진왜란 직후 왜군이 남해로부터 섬진강을 타고 올라오는 동정을 유심히 살피기 위하여 마을 둘레를 나무울타리로 성을 쌓고 마을중앙 출입구에 나무로 높이 덕을 매서 만든 망대(望臺)에 올라가 적의 내침여부의 동정을 살피는 관문(關門)이기도 하다.
거북정(龜亭)은 섬진강 도선장(渡船場)에 위치한 정자로 난리가 있을 때마다 섬진강을 건너 오는 도선장의 검열장소였으며 왜군의 내침여부를 탐색하는 아군 초소로서 요충지이다.
요천(蓼川)의 강물 가운데에 모단(慕檀.일명 獨山이라함)이 있는데 이는 세전마을에서 국왕의 녹을 먹었던 사인(士人)들이 모단에 올라가 한양의 인군을 사모배앙하는 모앙경화(慕仰京華)의 단(檀)이었다. 또한 신산(新山) 앞 동산에는 공북대(拱北臺)는 조정에 애경사가 있을 때마다 국은(國恩)을 회상하며 이 마을 사인(士人)들이 북향사배한 단이다. 이 단은 이조 영조 때에 사복시정(司僕寺正)인 김수태(金壽泰)가 전위통정(傳爲通政)을 가자(加資) 받고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세운 단이라 한다.
한편 비지정 문화재로서 큰샘(大井)은 대형석판재(石板材)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정자(井字)를 이루고 있어 지석묘와 더불어 문화재 지정이 시급히 요망된다. 지정 문화재로는 도선국사가 만복사, 용담사와 함께 창건하였다는 세전리 수정사(修淨寺)의 미룩불(지방문화재 220호)과 지방동산문화재로 708호인 호적단자(戶籍單子. 金相坤교수의 소장으로 九대조 이하의 호적단자)가 있다.

남원팔경(南原八景)으로 순강귀범(江歸帆)

마을주변은 요천(寥川)과 순자강( 子江)이 동서로 놓여 전남북 도계를 이루고 있다. 한편 금지면과의 경계를 이룬 요천(蓼川)과 수지천인 조천(棗川)등이 마을 앞에서 삼합(三合)이 되어 남원팔경(南原八景)의 하나인 순강귀범( 江歸帆)의 절경을 이루웠다. 남원의 유일한 섬인 고도(姑島. 속칭 딸섬)에는 정유재란 직전에 권율장군(權慄將軍)이 수천명의 군사와 함께 군사훈련하던 연변장으로 유명한데 일명 순자진도( 子津島)라 칭한다(亂中雜錄). 순자강은 강폭이 한강처럼 700m나 되고 99곡의 물이 합류된 약수물로 넘쳐 넓은 백사장에는 예로부터 남원과 곡성지역의 인근지역민의 민초(民草)들이 여름철이면 강수욕장으로 삼복더위를 식히던 곳이다. 강언에 돌출한 군둔암(軍屯岩)의 언덕위에는 백암 농암을 배행한 동진사(東津祠)가 있고 그 밖에 언양김씨의 오대정(鰲戴亭), 구인문회(九人文會)의 횡탄정(橫灘亭), 그리고 보인정(輔仁亭)등 많은 누정문화(褸亭文化)가 한곳에 배열되고 있음이 바로 이곳이 남원팔경의 비경임을 실감케 한다.
또한 강안(江岸)의 깎아 지른듯한 암벽위의 짙푸른 소나무 숲에 자리한 동산정(東山亭)의 정취는 마치 중국 적벽강(赤壁江)의 안상팔경(岸上八景)을 연상케 한다. 더욱이 울창한 수목과 동산정 암벽아래 넘실거린 푸른 물결에는 옛날부터 남해안 하동포구(河東浦口)로 부터 소금과 어패류를 가뜩 실고 순자강( 子江)을 소항(溯航)하는 각종 범선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며 내륙 깊숙히 파고 드러와 짐을 풀고 다시 석양 빛을 받으면서 순풍에 돛을 달고 강심을 가르며 하동포구로 귀항하는 황포돛대의 모습은 흡사 중국 洞庭湖의  王閣 아래 일엽편주처럼 아련한 모습이 마치 동양화의 한폭 그림 같기도 하다. 이와같이 아름다운 경치로 인하여 이 곳은 예로부터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항상 끊이지 않고 선유(船遊)를 즐기던 곳으로 많은 시운(時韻)을 남긴 남원팔경중 가장 손꼽힌 명소이다. 다만 이 지역 주민의 소원이 있다면 여기에 교량이 가설되었으면 금상첨화가 아닐가 기대하고 있다.

또한 세전리 마을 주변에는 아름다운 주변경치에 편승되어 누정문화가 매우 발달 되었다. 특히 만송정(晩松亭)에는 남원 유림들의 시회(詩會)가 있었고 신산 저수지변에는 추호정(楸糊亭)이며 학송루(鶴松樓)가 오간 접집으로 그 웅장한 모습을 들어 내고 있어 이 지역의 대표적인 자랑거리다. 그밖에도 학문강학(學問講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반룡정사(盤龍精舍)와 녹항정(鹿亢亭)이며 이합정(二合亭)등이 마을주변에 자리하고 있어 마을운치를 더욱 빛내고 있다.

지역개발과 특산물(特産物)

순자강에는 은어잡이가 삼복(三伏)더위에 절정을 이룬다. 섬진강 은어는 다른지역 은어보다도 담백한 맛이 풍부한 은어회(銀魚膾)로 더욱 유명하다. 옛날에는 임금께 진상하는 진상품(進上品)으로도 각광을 받았다. 은어회의 특출한 맛을 보기 위해서는 6월 유두(流頭) 이후 삼복더위에 이르기까지 천렵으로 은어잡이가 절정을 이룬다. 이 지역 민초들은 만드리가 끝나면 은어잡이로 순자강은 초만원을 이룬다. 최근  子江이 수원고갈로 물이 적었으나 94년도에 약 650m 길이의 수중보가 건설되므로 광활한 인공호수가 마련되므로 어족자원이 풍부하게 되어 봄, 여름, 가을동안에는 강태공과 물놀이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특히 겨울철에는 각종 철새 도래지로 유명하여 보호조치가 절실하며 이 지역주민들을 흥분케 하고 있다.

세전리의 주산물은 미맥 중심의 농업이었다. 미질이 매우 좋아 예로부터 임금께 진상하였다는 진상답(進上沓)이 들 가운데 자리하고 있어 미곡 주산지로서 질 좋은 주곡 생산지로 유명하다. 특산물은 전국최고의 딸기 집단재배지로 유명하고 그 밖에 참외, 수박 등 고등원예단지 조성의 결과로 집단출하는 요천대교(蓼川大橋 金相坤씨 유치)의 건설로 더욱 활발하여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되어 부농의 꿈을 이룩하고 있다. 지역개발로는 84년도 세전까지의 도로 확포장, 84년도 세전지구 경지정리 및 3대강에 5개 대형양수장 건설, 92년부터 94년까지의 섬진강, 요천, 수지천 호언공사의 완료와  子江 수중보가 건설되었고 97년도 세전교의 건설과 세전에서 수지면 남창리를 연결한 접속도로의 확포장 등이다. 앞으로 송동면민의 숙원사업인 순자강교가 건설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충효절사(忠孝節士)와 인물(人物)

마을 주변의 산천경관이 병풍처럼 수려하고 지령인걸(地靈人傑)이란 명언처럼 사람들도 매우 영명하다. 즉 동에는 견두산(犬頭山)이 있어 범죄없는 마을로 손 꼽히고 남에는 천덕산(天德山)이 동서로 날개를 펴고 우뚝 솟아 무사(無私)를 상징하고 있으므로 마을 인심이 너그럽고 풍부하여 시비가 없다. 특히 동남편에는 깃대봉과 천마산(天馬山), 서남편에는 형제봉(兄弟峰)과 통명산(通明山)등 문필봉(文筆峰)이 좌우로 높게 솟아 마치 어전에 문무백관이 배열되고 있는 것 같아서 예로부터 이 마을에서는 항상 문필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문사(文士)들이 속출하였다. 그런만큼 이 마을이 남원에서 제일가는 명기(名基)가 아닐 수 없다.
고로(古老)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 마을 최초의 정착은 이씨와 윤씨 및 조씨(趙氏)였다고 하는데 정착연대는 명확치 않다. 단, 우리들이 알기로는 조선조 중기 무오사화와 임진왜란을 계기로 이 지역 사람들의 의병활동이 많았던 점으로 인하여 왜군의 방화약탈로 인하여 기존 정착민들이 많은 이동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영남 청도(淸道)로부터 세전리에 정착하여 번창하게 된 김해 김씨 삼현파 진의공(進義公) 김현(金鉉)의 후손들을 들 수가 있다. 그 다음으로는 창령 조씨, 남원 양씨, 해주 오씨, 밀양 박씨 등의 순으로 보고 있다.
무오호사화를 기하여 성균관 진사 김광손(金광孫)과 아들 진철(璡哲)이 곡성 옥과(玉果)에서 은거하였는데 그의 손자인 김치도(金致道)가 의병장으로 출정하여 남원 숙성치(宿星峙)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충효와 전공으로 가선(嘉善)과 호군(護軍)을 증직하고 명정(命旌) 하였다. 이러한 남원과의 인연으로 그 아들인 김세인(金世仁)이 곡성 옥과에서 처음으로 남원 세전마을에 정착하면서 대족(大族)으로 번창하였다. 한편 임진왜란때의 충신으로는 직아래(稷下村)에서 출생한 고득뢰(高得賚) 장군이 세전마을에서 수백명의 의병을 동원하여 최경회(崔慶會)장군의 부장이 되어 진주성(晉州城) 전투에서 결전하다가 절사하였다. 그분의 애마(愛馬)가 고장군의 갑옷과 투구를 물고 왔으므로 투구갑옷의 무덤과 말 무덤이 현재 직하촌 버들뫼에 묻혀 있고 주생면 정송리의 정충사(정忠祠)에 배행되었다.

조선후기의 충신으로는 무신난(戊申亂)에 창의하여 절사한 김만광(金萬光)은 병조참판으로 고종때 증직(贈職)되어 명정(命旌) 하였다. 영조 4년 정희량(鄭希亮)의 난(亂)에 창의한 사복시정(司僕寺正) 김수태(金壽泰)는 세전마을에서 80여명의 창의병을 동원하여 함양 역적 최존서(崔存緖)를 생포효수하여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정조대왕 14년에 이르러 공의 나이 82세로 어전에서 존호(尊號) 후추(後推)와 전위통정대부(傳爲通政大夫)로 가자(加資)하고 마을 뒤에 사패지지(賜牌之地)를 하사하였다. 미륵증 끝에는 그의 솔대밭과 마을 앞에는 하마석(下馬石)이 있었으나 일제초에 철거되었다. 구한말 일제때의 항일창의는 병오년말(1906)에 일제가 헌병대를 남원 광한루에 주둔시키면서 탄압이 거세지자 일본 헌병대를 격퇴시켜 3일천하를 만들었던 양한규(梁漢奎), 박재홍(朴在洪) 사건에 동참거사한 김창술(金昌述)과 김기식(金淇植)을 그리고 남원 독립만세에는 김용호(金容鎬) 등을 들 수가 있다.

문과(文科) 급제로는 조선중기에 성균관 사성(司成)인 장응량(張應梁)과 금구현령을 지낸 문장으로 사촌(沙村) 장경세(張 世)과 함께 5명이 있다. 현량과 급제로는 김매(金梅)를 들수가 있다. 한편 무과(武科) 급제는 정3품으로 절충장군을 지낸 김선귀(金善貴)와 선달(宣達) 김호두 (金 斗)를 들수가 있다. 가장 높은 벼슬은 정2품으로 대감을 지낸 숭전대부 호조참판 지의금부사(戶曺 判 知義禁府事) 김연조(金延祚)를 들 수가 있다. 다음 생원진사(生員進士)는 김현(金鉉)을 비롯하여 김광손(金光孫), 김석적(金碩迪), 김석해(金碩海), 김규현(金奎鉉), 김창민(金 昌玟) 및 오수열(吳守烈) 등을 들 수가 있다.
성리학 학자는 기노사(奇盧沙)의 수제자요 성리학에서 이일분수(理一分殊)에 근거한 유리론(唯理論)의 거목인 대곡(大谷) 김석구(金錫龜)와 성재(惺齋) 김제휴(金濟休) 그리고 도학군자는 혜민원 주부(惠民院 主簿)인 潛田 吳宰烈을 들 수 있다. 문장에는 참봉( 奉) 김창우(金昌宇)와 윤문장(尹文章)이 있다. 글씨에는 이도정(李都正) 등이다. 현대 인물로는 전주 지방법원 판사(判事) 김용구(金容球), 문학박사 김태곤(金兌坤), 행정학박사 김한곤(金漢坤), 공학박사 김천곤(金天坤), 공학박사 김해곤(金海坤), 공학박사 김광헌(金光憲), 문학박사 김상곤(金相坤) 등을 들수 있다.
효행(孝行)은 김재극(金再克)과 김창량(金昌良), 김제락(金濟洛)을 들수 있으며 효부(孝婦)는 창령조씨 가문의 전주이씨와 김해김씨 가문의 진주강씨 순이(順伊)가 있다. 열녀(烈女)는 창령조씨 조명윤(曺命尹)의 처 진주하씨와 전주이씨 등이다. 사우(祀宇)로는 김세인(金世仁)의 제행을 위한 경모재(敬慕齋)와 녹천사(鹿泉祠)에는 잠전(潛田) 오재열(吳宰烈)선생과 만학(晩學) 김익두(金益斗) 및 양곡(陽谷) 양석권(梁錫權)선생의 사우가 있다. 이처럼 인물번성으로 말미암아 요천(蓼川) 하루의 모단(慕壇)은 김해김씨 문안의 국록을 먹는 신하들의 인군을 원배하는 경앙지단(景仰之壇)이다. 마을앞 망덕(望德)거리의 두던에는 구한말까지만 하여도 소적(속칭 솔대)이 12개나 나열되어 인물번성의 상징이 되었으며 명칭대로 명실상부한 망덕(望德)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 文學博士 金 相 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