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정사의 삼일왕정
- 귀정사의 중창 유래
- 귀정사 재물담
- 태조봉과 고남산
- 목동리 은행나무
- 승련사와 식련리
- 식련마을 뒤 바위의 전설
- 식련리 당산제
- 석동 당산제
- 월산 당산제
- 부절 당산제
- 부절 관암
- 중절 당산제
- 목동 당산제
- 신풍 당산제
- 태평 당산제
- 등구 당산제
- 대촌 신기 당산제
- 대상 한재 당산제
산동면 전설
태조봉(太祖峰)과 고남산(古南山)
- 산동면 중절리(中節理)와 운봉읍 권포리(權布理) 사이에 고남산(古南山)이 있다. 높이 856m이며 남원시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보면 운봉 여원재 서쪽 끝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곧 이 산이다. 사람들은 이 산을 태조봉(太祖峰)이라고도 하는데 태조봉이라 부르는데 까닭이 있다.
- 고려말 우왕(禑王) 6년(1380) 인월리에 본 진을 치고 약탈, 살인, 방화를 서슴치 않으며 장차 공주를 거쳐 서울 한양으로 쳐들어 갈 것이라 호연 장담하는 왜구(倭寇)의 병력은 2천명을 넘었다. 그 우두머리는 아지발도(阿只拔都:18세)인 바 그에게는 알 수 없는 괴력이 있었다.
- "자! 이 아지발도를 어떻게 잡는단 말인가?"
"그 놈은 쇠로 생겨 활을 맞아도 죽지를 않고 몸에 맞은 화살이 튕기져 나온다지"
이런 말이 유포되니 아지발도의 말만 들어도 무서워 떤다. - 아닌게 아니라 이제 18세 밖에 되지 않지만 몸이 어찌나 크고 힘이 장사인지 한끼니 밥을 한 말 밥을 먹고, 백근짜리 도야지를 혼자 거뜬히 먹어 치운다.기운이 넘쳐 갑옷을 쇠로 만들어 얼굴만 살이지 온 몸을 철판으로 감았다. 말하자면 쇠옷을 입은 것이다. 그러니 싸움터를 달리되 무서울 것이 없다.
- 이 때 조정에서도 날마다 묘책을 강구하느라 중신들 회의를 하지만 뽀족한 대책이 서지 않는다. 어느 중신이 이성계 장군을 추천하였다. 장군은 원래 함경도 출신으로 여진족을 대항하느라 무술을 익혀 이제는 천하 제일의 명궁이다.
- 그 뿐 아니라 여진족의 대장 퉁두란(董豆蘭)이 수하를 이끌고 이성계장군에 굴복했는데 퉁두란의 활솜씨는 신묘하였다. 이제 이장군의 명궁에다 퉁두란의 활솜씨가 하나가 되었으니 고려말 이 두 장군의 활은 신궁(神弓)이라 할만치 위력이 있었다.
- 이러한 이성계장군이 추천이 되니 우왕도 저윽이 마음을 놓고 곧 이장군에 정왜원수(征倭元帥)를 임명하여 남원으로 출정을 명하였다.
- 이성계장군은 변안렬(邊安烈)을 참모로 삼고 퉁두란을 아장으로 삼아 한양을 출발, 전주 한벽당에 잠시 들려 쉬었다가 대오를 정비하여 쏜살같이 남원에 도달하였다.
- 이 때 멀리 운봉쪽을 바라보니 고남산이 유난하게 뽀죽하다. 그래서 이곳에 올라 산신제를 올려 우선 천지신명께 전승을 기원한 것이다. 제단을 쌓아 경내를 신성하게 하고, 창덕암(昌德庵) 약수터에 목욕재계 한 다음, 고남산 제단에 올라 3일간 산신에게 전승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 장군은 황산에서 아지발도를 사살하는데 성공하였으니 어쩌면 고남산 산신제때 어떤 계시를 받았음이 아닐런지?
- 아지발도는 왜국을 출발할 때 애인이 있었단다. 그 애인은 출전하는 아지발도의 옷자락을 붙들고 하는 말이 "장군님의 이번 출정은 대단히 불길하오니 다음 기회로 미루소서. 조선에 가면 황산이란 곳이 있는데 그 곳 산신이 크게 노하고 계십니다" 하였다.
- 이 말을 들던 아지발도는 "요망한 계집이로고! 장부의 앞길을 불길하다니 네가 필연코 황산 산신의 화신이 아니냐?" 하며 단칼로 목을 베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애매한 목숨을 죽인 죄값을 황산에서 받은 것이라 하였다.
뒷 사람들이 고남산 정상을 태조봉이라 부르게 된 것은 이런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