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정사의 삼일왕정
- 귀정사의 중창 유래
- 귀정사 재물담
- 태조봉과 고남산
- 목동리 은행나무
- 승련사와 식련리
- 식련마을 뒤 바위의 전설
- 식련리 당산제
- 석동 당산제
- 월산 당산제
- 부절 당산제
- 부절 관암
- 중절 당산제
- 목동 당산제
- 신풍 당산제
- 태평 당산제
- 등구 당산제
- 대촌 신기 당산제
- 대상 한재 당산제
산동면 전설
승련사(勝連寺)와 식련리(植蓮里)
- 승련사(勝連寺)가 서 있었다는 만행산(萬行山)은산동면과 보절면의 경계에 있어 그 뿌리는 멀리 무주(茂朱)의 덕유산(德裕山)에 있다.
- 덕유산(德裕山)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장수(長水)에 이르러 두 갈래로 갈라지니 한가닥은 동남쪽으로 뻗어 지리산(智異山) 줄기를 이룩하고 다른 한가닥은 서남편으로 뻗어 만행산이 되었다.
- 이 만행산이 또다시 남으로 뻗어 나즈막한 백공산(百工山)을 이루었는데 이것이 지금 용성고등학교가 서 있는 산줄기이다. 이곳에 있었다는 승련사(勝連寺)의 옛 이름은 금강사(金剛寺)라 하였다.
- 비록 규모는 적었으나 이 절에는 홍혜국사(弘蕙國師) 등 고려시대의 이름난 고승들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이 절이 처음 세워진 년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고려말 홍혜국사는 이 절을 크게 확장하려고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니 그 뒤를 이어 대선사 졸암(拙庵)이 주지가 되었다. - 그는 일찌기 조계종의 깊은 뜻을 얻어 홍혜국사를 보좌하고 있다가 스승이 입적하니 여러사람들은 그를 받들어 금강사(金剛寺)의 주지를 삼았다. 졸암(拙庵)은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먼저 사찰의 대확장 공사를 착수하였다. 그러나 본래 재력의 여유가 없어 충숙왕 12년(서기 1325년) 공사를 시작하여 공민왕(恭愍王) 10년(서기 1361) 봄 준공하니 실로 전후 36년이란 긴 세월이 소요된 것이다.졸암은 공사를 마친후 사찰 이름을 승련사(勝連寺)라 고쳤으니 이때 그 규모는 불당(佛堂), 선당(禪堂), 빈객실(貧客室), 창고(倉庫)등 무려 110칸에 이르렀다 하며 승려수는 2백여명이나 되었다.그리고 산동면 식련리(植蓮里)는 승련사의 연꽃을 갖다 심고 마을 이름을 식련이라 불렀으니 이 마을은 승련사의 승려들이 거래하던 사찰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그리고 산동면 식련리(植蓮里)는 승련사의 연꽃을 갖다 심고 마을 이름을 식련이라 불렀으니 이 마을은 승련사의 승려들이 거래하던 사찰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