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리
본래 운봉의 남면(南面)지역으로 공안리(孔安里)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수철리, 용은리와 덕산리, 유평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공안리라 하여 남원군 운봉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3월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운봉읍 공안리가 되었다. 공안리에는 수철, 공안, 용은 , 유평 등이 있다.
공안(孔安)마을
- 본래 운봉의 남면(南面) 지역으로 공안리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수철리, 용은리와 덕산리, 유평리 각 일부가 병합되어 공안리에 편입되었다.
- 본래 남면의 면 소재지였던 만큼 마을 유래도 깊어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밀양 박씨가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 1895년부터 운봉군 남면지역으로 남면청사가 있던 곳이엇는데 이무렵 마을의 규모는 100여호에 달하는 대촌(大村)이었으나 소재지가 운봉으로 옮겨가고 6.25를 겪으면서 마을이 극도고 위축되었다.
- 처음에는 공안리(孔安里)라 하였다. 공안(孔安)이란 원래 이곳에 훌룡한 고을 선비들을 초빙하여 유학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던 공안재(孔顔齋)란 서재가 있었다.
- 서재 이름이 말하여 주듯이 공자(孔子)나 그의 수제자 안자(顔子)와 같은 성현이 배출되도록 기원하는 의미에서 첫글자를 따서 공안제(孔顔齋)라 명명하였는데 이 마을을 ‘공안재가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공안리(孔顔理)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후 원공안리(元孔安里)라 했다가 다시 공안(孔安)으로 바뀌었다.
- 이마을의 공안림(孔安林)에는 과거 백제(百濟)의 포로를 가두어 뒀던 옥(獄)이 있었다고 전한다.
수철(水鐵)마을
- 운봉읍 소재로부터 5.6km지점에 위치, 500m전방에 전북학생교육원이 위치하며 면도 103호가 마을을 통과, 세걸산 아래에 위치하고 낙동강의 발원지이다.
용은(龍隱)마을
- 본래 운봉의 남면(南面)지역으로 용은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수철리, 용은리와 덕산리, 유평리 각 일부가 병합되어 공안리에 편입되었다.
- 마을의 형성은 약 200년 전으로 처음 이 마을을에 정착한 사람은 청도 김씨이다. 이들 김씨는 현재까지 마을의 대종을 이루고 있으며, 그후 박시, 이씨, 오씨, 등이 차례로 이주하며 마을을 형성하여 왔다.
-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느 도사가 이곳을 지나가다 마을 터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이 마을에 언젠가는 용이 나타났다가 승천하지 못하고 숨어버릴 형국이라 하였다고 한다.
- 그로부터 수년후 과연 짙은 안개와 함께 발산에서 내려온 용이 마을 어딘가에 숨어버렸다고 한다. 그후 이 마을을 용이 숨은 마을이라하여 용은(龍隱)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 또 일설에는 마을 형성 이전부터 신라말 도선국사가 이곳이 용이 숨어 있는 길지임을 알고 터를 잡아두었는데, 그후 사람들이 명당터를 찾아 들어 살면서 용은(龍隱)마을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마을 동쪽에 작은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를 용 이빨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유평(柳坪)마을
- 본래 운봉의 남면(南面)지역으로 유평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수철리, 용은리와 덕산리, 유평리 각 일부가 병합되어 공안리에 편입되었다.
- 1680년경 함양 박씨(咸陽朴氏)가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하여 10여호의 작은 마을로 이어져 오다가 조선조말에 30여호로 늘어났다.
- 처음 마을 이름은 낙안리(落雁里)로 불리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한번 객지로 나가면 고향을 잊고 영영 돌아오지 않자 마을이 위축되고 빈한해지자 마을 선비들은 주민의 뜻를 모아 마을이름을 바꾸기로 하였다.
- 오랜 심의결과 유평마을이 공안들녁에 위치하여 주변에 버들가지가 많고 또한 수양버들 숲이 있어 버들은 번식력이 강한나무로 마을에 강한 재생력과 번창을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로 「벗들」이라 부르기로 하고 한문으로 ‘유평(柳坪)’으로 표기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