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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읍 행정복지센터

화수리

본래 운봉의 서면(西面)지역으로 화수리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전촌리(前村里), 옥계리(玉溪里), 라 하고 남원군 운봉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3월 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운봉읍 화수리가 되었다. 화수리에 속해있는 자연마을로는 전촌, 소석, 육거리, 지와막, 비전,하마정, 옥계동,이 있었으나 현재 육고리, 지와막, 하마정, 옥계동은 폐촌되고 1961년 이후 군화동과 화신동이 새로 생겼다. 화수리에는 소석, 전촌, 비번(碑殿), 화신(花新)등이 있다.
엄계(嚴溪)마을
  • 본래 운봉의 서면(西面) 전촌리 지역으로 비전(碑殿)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전촌리(前村里), 옥계리(玉溪里), 소석리(小石里) 일부가 병합되어 화수리(花水里)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 군화동(軍花洞)이 있다.
  • 마을앞에는 황산대첩비각(荒山大捷碑閣)이 있다 하여 비전(碑殿)으로 불리게 되었다.
  • 고려 우왕 6년(1380년)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조 선조 10년(1577) 운봉현감 박광옥이 세운 대첩비는 일제시대 일본은 이비를 파괴하였고 현존의 비각과 비석은 8ㆍ15광복후 1957년 10월27일 다시 재건한 것이다.
  • 이 대첩비각을 세운 후 참봉과 몇사람의 관원으로 관리하게 하였는데 그 식솔들이 모여 살게 되고 그후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기 시작하여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으로게 되었을 추정된다. 또한 서편에 하마정이 있어 말을 탄 관리가 황산대첩비각을 지날때면 하마비(下馬碑)가 서있는 이곳에서 말을 내려 걸어와 비앞에서 절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에는 구한말까지 2층 정자가 있어 주변의 주막의 기녀(기생)와 소리꾼, 가마꾼이 상주하던 곳이었다.
  • 동편제의 가왕(歌王)이라 일컫는 송흥록과 송만갑의 출생지가 비전 마을이고 명창 박초월이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 군화동(軍花洞) 1961년 대홍수대 소며된 화수리 이재민들의 가옥을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13가구를 건립하였는데, 이주후 마을 이름을 ‘군인들이 만들어준 화수마을’이란 뜻으로 군화동(군화동)m로 부르게 되었다. 군화동은 황산대첩을 이룬 황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소석(小石)마을
  • 본래 운봉의 서면(西面)지역으로 소송(小松)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전촌리(前村里), 옥계리(玉溪里), 소석리(小石里) 일부가 병합되어 화수리(花水里)에 편입 되었다.
  • 조선조 숙종 때(1674년~1720년) 평산신씨, 이씨, 범씨가 처음 이곳에 터를 잡고 차차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신씨, 이씨, 범씨, 이들 세 성씨들이 처음터 잡을 때 주위가 큰 소나무에 숲에 둘러 쌓인 작은 마을이므로 소나무에 쌓인 작은 마을라 소송리(小松里)로 이름을 지었다가 후에 마을 뒷산에 잔돌이 많아 소석리(小石里)로 개칭하였다.
전촌(前村)마을
  • 본래 운봉의 서면(西面)지역으로 전촌(前村)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전촌리(前村里), 옥계리(玉溪里), 소석리(小石里) 일부가 병합되어 화수리(花水里)에 편입되었다.
  • 조선조 숙종(1674년~1720년)초에 운봉읍 밀양 박시가 항산대첩비옆 북천 천변에 낚시를 하다가 대첩비 입구의 소나무 숲이 우거져 아름다운 풍치에 이끌리어 이곳으로 옮겨 살게 된 것이 마을의 시초이며, 그후로 김씨, 이씨, 강씨가 차례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운봉에 사는 밀양 박씨들은 숫자가 많이 번창하자 혼잡을 피하기 위해 동박과 서박으로 나뉘어 졌는데 이때 전촌리에 들어온 박씨는그중 동박에 속한 사람이다. 황산대첩비가 세워져 있는 앞 마을이므로 속칭 앞마을 또는 앞몰이라 칭하였는데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전촌리(前村里)라 표기하게 되었다.
  • 태조 이성계의 대첩비각이 있는 사적지에 인접해 있는 관계로 항상 수려한 환경을 유지하여 전촌도 그 영항을 받아 아름답고 깨끗한 마을로 정평이 나 있었다.
  • 마을입구의 수백년 자라온 소나무 숲은 천하일품의 풍치를 자랑하고 있어 철따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화신(花新)마을
  • 1969년 북한 김신조 부대의 대남 침투 사건이후 독가촌(獨家村)을 한데 모아 화수리에 편이바여 화수리에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으로 화신(花新)으로 부르게 되었다. 행정적으로 독가촌 여러 세대가 일시에 이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