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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읍 행정복지센터

명창들

송흥록

황산대첩비

  • 송흥록이 태어난 년도는 확실치 않으나 영조 52년(1776년)에서 정조20년(1796) 사이에 태어났을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일설에는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인 김병기(金炳冀 1818)와 생년 생월 생시가 같아 둘이는 무척이나 가깝게 지냈다고 하나 여러가지 상황을 미루어 보아 전자의 이론이 옳다고 보겠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순조 27년(1827)에 전국 명창 대표들이 조정에 연명으로 글을 올렸는데 이를「정해팔도재인등장(丁亥八道才人等狀)」이라는 문서가 있다.
    여기에는 전국 명창 40명이 서명하고 있는데 송흥록의 이름이 열 한 번째에 올라 있다는 것이다. 만약 1818년에 그가 태어났다고 하면 그의 나이 겨우 8,9세 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아뭏든 송흥록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훤출하였으며 재주와 슬기가 출중하였기에 6살때 서당을 다니면서 선생님께 칭찬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선생은 흥록의 재주와 풍채에 탄복하여 이르기를 "네가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면 큰 인물이 될 것인데...... 아까운 일이다"라고 하였단다.

흥록은 소리에도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나 그의 부친 송첨지가 한두번 가르쳐준 소리는 잊지 않고 따라 했다는 것이다. 송첨지는 권삼득 명창 고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송흥록이 살고 있는 비전 마을에 최부자집이 있는데 송흥록과 최부자집 아들과 같은 서당에 다녔단다. 송흥록을 서당에서 신동이라고 추켜세우자 샘이난 최부자 집에서 걸핏하면 트집을 잡아 수시로 송흥록 아버지를 불러다 볼기를 쳤다고 한다.
흥록은 이에 분개하여 열두살 되던 해에 최씨 아들을 두들겨 패주고 집을 나와 광양의 백운산에 있는 절로 들어갔다고 한다. 절에 들어가는 도중에 마침 운봉을 다녀오던 월강선사(月光禪師)를 만났고 그 스님은 흥록을 보고는 가무보살이 재현한 것으로 믿고 그를 잘 가르쳤다고 한다. 소리도 지도해주고 의술과 관상보는 법까지도 알려주었다.
후일 송흥록이 명창이 되어 세상을 나와 어느날 길가다 우연히 쓰러져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가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를 일으켜 잘 치유시켜 보냈으니 그가 바로 후일 세도가였던 김병기(金炳冀)였다. 송흥록은 대원군의 관상도 알아보고 후일 큰 인물이 되겠다고 생각하여 뒷일을 잘 봐주다가 그와 가깝게 지냈으며 후일 그들의 주선으로 벼슬도 갖고 어전에서 소리도 하는 명실공히 가왕이 된 것이다.
송흥록이 판소리사에 남긴 업적은 우선 크게 두가지를 꼽을 수 있다.
귀신 울음소리를 내는 귀곡성(鬼曲聲)과 가장 느린 장단을 말하는 진양조를 창조해 냈다. 귀곡성은 춘향가 중에서 춘향이 옥중에 머리풀고 갇혀있던 밤, 비바람치고 도깨비 휫휫거리며 귀신들이 둘씩 세씩 짝을지어 귀신소리를 내는 장면에서 마치 귀신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소리를 내는 창법이다. 송흥록은 이 귀신소리를 공부하기 위해 아장터(공동묘지)에서 몇달씩 잠을 자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가 마침내는 고동묘지에서 잠이들어 꿈을꾸다가 귀신들을 따라가 귀신들이 가르쳐준 소리를 듣고 '이이~ 이히이~ 이히히~이'하고 따라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소리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 대목 공부하는데 많은 공력을 쏟고 있는 형편이다.
송흥록의 귀곡성에 관한 이야기는 또 있다. 그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대구 감영에서 그를 불러 소리를 듣게 되었다. 모든 청중이 그의 소리에 탄복을 하며 명창이라 칭찬을 하였는데 오직 한사람만이 입을 열지 않고 그를 칭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바로 맹렬(盟烈)이란 경상감사의 수청기생이었다. 가무에 뛰어난 그 기생은 흥록에게 소리가 아직 멀었다고 했다. 입에서 피를 세 동이는 토해내야 명창이될 것이라고 했다.
흥록은 다시 운봉으로 돌아와 폭포아래서 석달 동안 몸부림 치면서 공부를 하여 붉은 피를 토해냈다고 한다. 그의 성음은 폭포 밖까지 울렸고 십리 밖까지 들렸다고도 한다. 그는 그 후 다시 대구 선화당(宣化堂)에서 소리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맹렬은 그의 소리에 반하여 둘이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청기생이었던 맹렬은 성격이 몹시 까다롭고 날카로와 둘이는 자주 싸웠으며 흥록이 어디 갔다 집에 오기로 한 날 보다 3일 늦게 돌아왔다하여 맹렬은 진주로 달아나서 진주 병사(兵使) 이경하(李景夏)의 수청을 들고 있었다 한다. 맹렬은 진주 병사를 시켜 송흥록을 부르게 하여 소리를 청해 듣기로 했다.
만약 소리 솜씨가 좋아 그를 웃기고 또 울리게 되면 상금 삼백냥을 주되, 만일 그렇지 못하면 흥록을 죽이겠다고 했다. 흥록은 그것이 맹렬이의 소행인지는 알았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웃기고 또 수궁가 중에서 토끼 배가르는 대목을 애원성으로 슬프게 하여 그를 울렸다고 한다. 결국 맹렬은 진주 병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의 양해를 구하여 다시 송흥록을 따라 왔다고 한다.
한번은 진주 촉석루에서 어느날 밤 수천명의 청중 앞에서 송흥록이 춘향가를 부르는데 앞에서 터득한 귀신 나오는 대목을 귀곡성으로 할 때 갑자기 바람이 일고 수십개의 촛불이 동시에 꺼지며 하늘에서 귀신우는 소리가 들려와 모두가 놀랬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송흥록의 무덤이 비전에 남아있어 비만 오면 밤에 내 소리 받아 가거라 하는 소리를 주민들이 많이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어느 무덤이 송흥록의 무덤인지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점도 하루 빨리 조사하여 가왕의 묘를 복원시키고 국악의 성역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박초월

1916년 태어나 어려서부터 가요의 천재라 불리울 만큼 성음이 청미하고 성량이 풍부하였다. 12세때부터 김정문 명창에게 사사를 받았으며 국창 송만갑의 지도로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를 배웠다. 1933년 서울로 상경한 그녀는 1939 동일창극단 단원으로 정광수 박귀희 등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만주, 일본 등지까지 공연을 다녔다. 박초월은 젊어서는 날씬한데다 얼굴이 어여뻐 언제나 춘향역을 맡았고 정광수는 이도령역을 맡았다.
박초월은 오케이 레코드, 폴리돌, 빅타 레코드 회사와도 계약을 맺어 레코드 취입을 하여 명성을 떨치었다. 박초선 언니와 초홍이 동생 등 세자매가 소리를 아주 잘했으며 박초선 역시 목이 아주 좋았고 이들 세자매가 창극단에서 활동한 바 있다.
박초월은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인간 문화재)로 수궁가 예능 보유자가 된후 1984년 대통령 훈장을 받았다.
운봉에 국악인들을 초빙하여 공연도 한바 있고 새마을 사업이 한창이던때 운봉읍에 싸이렌(확성기)시설을 설치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살아있는 최고령 인간 문화재인 정광수(89) 명창 그녀에 대하여 필자에게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정광수

1909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그는 현존하는 명창 중의 가장 고령이나 아직도 후진 양성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1964년 최초 다른 5명과 함께 무형 문화재 판소리 보유 예능자로 지정된 그는 박초월 명창에게 수궁가를 가르쳤다.
해방 전 어느 여름 운봉 비전 마을에 내려와 2개월 동안 박명창을 지도했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비전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쪽에 있는 제실(하마정 : 수해로 소멸(掃滅)되어 지금은 신기리 앞뜰이 됨)에서 두 달간 박초월에게 소리를 가르쳤는데, 수궁가중 날짐승 상좌 다툼하는데까지 가르쳤지. 수궁가 초입에 나오는 용왕의 병을 진단하는 대목 소위 「약성가」라고 하는 자진몰이 하는데서 무척 힘이 들었제. 그 어려운 대목을 제대로 가르치고 또 따라 할려고 했다가는 정(情)나게 생겼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제 여기는 여자들이 뭐 그렇게 잘 할 필요가 있겠냐고 그러면서 쉽게쉽게 대강 가르치고 넘어 갔어." 정 선생은 박명창이 목도 좋고 잘 따라 배웠다고 했다. 그러나 그 대목에서는 편법으로 가르치고 넘어가지 않을수가 없었다고 했다.
날 짐승 상좌 다툼까지는 수궁가 전체의 절반 정도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지금도 박초월 명창의 수궁가와 정광수 선생의 수궁가가 서로 많이 다르게 불리어지고 있음을 박초월 명창이 정광수 선생의 수궁가를 부르지 않고 먼저 배웠던 송만갑 선생의 소리를 불렀고 또 후진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는 얘기도 될 수 있겠다.
박초월 명창이 임유앵(1913~1964)명창과 함께 운봉에서 정광수 선생에게 수궁가를 배우고 있을때(해방 3년전) 서울에서 강장원(姜章沅 1909~1962) 명창이 내려왔다. 임유앵은 여성 국극단으로 유명한 임춘앵의 언니였으며 강장원의 아내였다. 정광수와 강장원은 이동백(1867~1950) 선생에게서 적벽가 초입인 삼고초려를 같이 공부한 동갑나기로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 였다. 그때의 여름 어느 운봉 장날 넷이서 달빛아래서 소리를 하게 되었다. 정광수 명창은 그때를 회상하며 "그때 임춘앵이 먼저 소리하고 다음에 박초월 그 다음에 강장원이 하고 내가 마지막으로 했지. 아따 운봉 사람들 소리 들을 줄 알더구만, 그때 운봉사람들이 정광수가 소리를 더 잘헌다 그러더라구. 강장원은 목은 좋은디 너무 점잖하게 소리해서 그렇더라고. 사실 목은 강장원이 나보다 더 좋았는디 그래서 나도 은근히 걱정을 했는디 발림하고 소리하는 내 모습이 더 잘 보였나 어쨌나 그러더라고" 그러면서 그는 한바탕 웃는다.
강장원은 그때 적벽가 초입인 삼고초려를 불렀다고 했다. 정광수 명창은 또 운봉 박부자 (박희옥)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나도 들은 이야기인데 그 부자 생일 잔치였는디 서울서도 모도 명창들이 많이오고 손님도 오고 했는디 대청에 넓게 자리잡고 건너방에서도 주렴을치고 명창들의 소리를 들었다는구만. 한번은 우리 선생 유성준 명창하고 임방울도 불렀더라구만. 그런디 그 박부자도 소리들을 줄 알더라구만. 그때 임방울이 세상에 잘 알려져 쑥대머리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디 유성준 명창은 임방울의 선생이고 또 우리 선생이제. 아주 큰 스승이신디 일반이들이 뭐 알까 했는디 그래도 박부자는 그렇게 이야기하더래 '가만히 소리를 들어봐라 인자 배운사람과 국창과는 소리가 다르니 유선생 수궁가는 구슬 노는 듯 하는디. 보라고 소리는 저렇게 하느니라' 그리고 출연료를 주는디 유선생에게는 아주 많이 주고 임방울에게는 유선생의 1/10정도 밖에 안주더래. 주위에서 명창들이 박부자에게 너무 차이난 것이 아니냐고 하니까 그러드래 '아직 젊은 사람이니 그래야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이 아니냐'고 하더래" 남원의 명창 강도근(姜道根)은 95년 작고 했지만 몇년전 필자에게 박희옥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박희옥은 전국의 많은 명창들을 불러모아 소리를 듣고 소리공부하게 하다가 명절때면 이 여류명창들에게 노자주어 집에 다녀오게 했다고 한다. 다른 면에서는 잘 모르나 최소한 우리나라 국악발전에는 기여를 많이 했다고 본다. 그러나 국악인들에게는 입으로 그의 얘기가 전해오지만 아직 책으로나 아니면 그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이 없었으나 이번 기회에 그의 공로를 어필하고자 한다. 운봉의 인물은 우리가 찾아 빛을 보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만석꾼 부자라고 하듯이 소리를 들을 줄 알고 멋을 아는 사람이었기에 항시 그의 집에는 국악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국악 발전에 가장 공로가 큰 사람으로는 고창의 신재효(申在孝 1812~1884)를 들고 있다. 그는 중인(中人) 출신으로 재산이 많은데다 판소리를 이해하고 좋아해 항시 소리꾼들을 불러보아 가르치기도 하고 후원도 했다.
그는 판소리의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와 변강쇠 타령, 이렇게 여섯 마당의 사설을 한자 내용에 맞게 개작하여 정리 했다. 그의 이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운봉의 박희옥씨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모르고 있어 앞으로 그에 대해 더욱 조사 연구해 볼만 하다. 이밖에도 많은 명창들이 알게 모르게 운봉에 다녀 갔거나 운봉 주위 폭포에서 공부를 하였다.
정령치 오르기 전 선유폭포나 구룡폭포 또 옥계동도 소리공부하기 좋은 곳이요, 지금도 방학 때면 많은 학생들이 구룡폭포나 구례 천은사 쪽에서 지리산의 정기를 받으며 소리공부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해방 후 6. 25동란 등으로 국악이 쇠퇴기로 접어들어 운봉에 명창들의 발걸음이 뜸하다가 최근들어 다시 운봉을 찾는 국악인이 많아졌다. 89년 5월 김수연(박초월제자) 명창 유영애 명창이 장교리 필자의 집에 와서 밤늦도록 소리를 하며 운봉의 정감을 맛보고 갔으며, 96년 6월 운봉 농협 주관으로 운봉 노인 한마당 잔치에 서울 및 광주지역 국악인들이 공연을 한바 있다. 또한 그 일주일 후 박초월 명창 양아들인 광주의 조통달 명창과 서울의 전정민 명창이 아영성리 흥보마을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이자리에는 서울 민학회(民學會)를 비롯 부산, 대구, 광주 지부의 민학회 회원이 많이 참석하였다. 서로 흥보마을이 자기 면(面)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아영면과 동면은 앞서 말한대로 옛날 운봉이었으니 판소리를 이야기하면서 운봉을 논하지 않고 그 두 개면의 각자 주장이나 마을 단위 자체행사는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앞의 운봉 노인의 행사에는 운봉출신(권포) 정춘실 명창이 공연을 하였고 필자도 서울에서 대모산 국악교실 제자들과 같이 내려와 공연을 한바있다. 흥보마을 공연에도 필자가 참여 하였으며 귀경길에 민학회 회원 전체가 운봉 비전에 들러 송흥록과 박초월 명창이 살았던 집을 둘러 보고 송명창 출신지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는 동산에서 한시간 이상 동편제 소리인 춘향가를 필자가 부르면서 소리고장 운봉에 대하여 다같이 공부한바 있다. 이자리에는 국악 연구가이며 전 정신문화 연구원 교수인 전종민씨가 북을 쳤다. 이처럼 우리 소리의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앞으로 운봉을 찾는 명창이나 소리공부를 하는 학생은 더욱 많으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