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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읍 행정복지센터

  • 비(碑)란 고인의 사적(事蹟)을 칭송하고 그 업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문장을 새겨 넣은 돌이다. 이는 우리 선현들의 높은 언행과 사상을 이어 받기를 바라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행적이다.운봉 4개 읍면에 비의 현황을 사적비, 효열비, 일반비로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사적비로는 운봉지역에 7개 동면지역에 3개가 분포하고 있다. 황산대첩비는 고려 우왕 6년 (1380) 인월역에 침입한 왜구를 이성계 장군이 황산에서 격퇴시킨 대첩을 기리기 위해 1577년 운봉 현감 박광옥이 도 관찰사를 통해 조정에 장계를 올려 건립한 기념비이다.축산고등학교 교정 서편에 세워진 절도사손공충어난비는 영조 4년(1728) 이인좌, 정희랑 등이 일으킨 난을 운봉 좌영장 손명대가 좌영군과 지역 의병들과 함께 매치와 팔랑치에서 대치하다가 함양으로 진격하여 함양위수 최존서를 사로잡아 운봉 관아에서 처형함으로써 호남 지역 난을 평정한 공로를 문중에서 기록하여 세운 사적비이다.
전적지 현황
전적지 분류, 소재지, 건립년도, 비 명 정보에 관한 표
순서 분류 소재 건립년 비 명(碑名)
1 사적비 비전마을 1577 황산대첩지비(荒山大捷之碑). 1957년 중건.
2 사적비 축산고 1808(?) 절도사손공구충어난비(節度使孫公舊忠禦難碑)
3 사적비 서천서림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蹟碑)
4 신도비 불선재 추만선생신도비(秋巒先生神道碑).
5 사적비 비전마을 1958 황산대첩사적비
6 충혼비 서천서림 1954 충혼탑(忠魂塔) - 6.25 군경 추모비, 1993년 중건
7 기념비 비전마을 1973 황산대첩기념비

절도사손공구충어난비 추만선생신도비 전적비 충혼탑 기념비

사적비

박봉양(일목)장군비

  • 사적비(事蹟碑) 서천리 서림 숲에 세워진 갑오토비 사적비는 1894년 갑오동학혁명 당시 남원 동학군이 운봉으로 진출하려 하자 박봉양이 운봉의 민보군과 함양 등지에서 보내온 지원병과 합세하여 방아치와 관음치 전투에서 격퇴시켜 운봉을 지킨 공로로 문중에서 세운 사적비이다. 본래 비의 위치는 운봉초등학교 교문 앞 민가에 있었으나 어느 땐가 현 위치에 옮겨 방치하다가 1993년경 비석의 좌대(비좌)를 새로 만들어 세웠다. 건립연대는 비문이 훼손되어 해독할 수 없다.
    [박봉양(일목)장군비]

박봉양 일목장군 유혜비

  • 추만선생 신도비는 고남산 북쪽 기슭 권포리 정씨 선산인 불선재에 위치하고 있다. 추만 선생의 이름은 지운(之雲)이다. 학식이 뛰어나 일찌기 [천명도설]을 저술하고 1514년 퇴계선생과 강론하는 등 천지 조화의 이치를 연구하였다. 선조는 사후 예조판서를 추증하였으며 경기도 고양시 칠현사에 배향된 인물이다. 추만 선생의 묘소는 고양시에 있으며, 정씨 문중에서 부인인 해주 최씨의 묘소가 있는 현 위치에 신도비를 세웠다. 역사적인 사건의 흔적과는 거리가 다소 멀다하겠으나 우리 문향의 고을을 대표하는 출중한 인물로 죽헌(竹軒) 오승(吳陞)과 함께 사적비로 분류하였다.
    황산대첩사적비와 기념비는 사적지 경내에 위치하며, 충혼탑비는 6·25 당시 지리산 공비 토벌 때 순국한 군인 42위와 경찰 72위 등 총 114위의 위령비로 1954년 8월 15일 당시 면장 박원용(朴元鏞)씨가 주축이 되어 건립하였다. 그 후 1993년 박영휘 면장이 주축이되어 서림 숲에 재건립하였다.
    [박봉양 일목장군 유혜비]
기타
피바위
  • 고려 우왕 6년(1380) 황산대첩 때 참수된 왜구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전한다.<지봉유설>에 의하면 임진년(1592)에 이 바위에서 저절로 피가 흘렀다고 하였다.
상사바위
  • 고남산 동북쪽 남원군 산동면과 장수군 번암면의 경계에 위치하는 높이 솟은 암벽이다. 옛날 상사병에 걸린 처녀가 이 바위 위에 올라가 떨어져 죽은 뒤 큰 지네가 되어 갈대 숲을 헤치고 다녔다는 전설이 있다.
주지암
  • 주지암(住智庵)은 신라 때부터 있어 오던 암자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이산(智異山)의 줄기가 이곳에 멈춰 이루어졌다 하여 산의 이름을 주지봉(住智峰)이라 하였다. 지이영봉(智異靈峰) 영향 때문인지 산신의 영험이 높았다. 우리의 옛 풍속에 소원이 있으면 명산에 빌고, 딸·아들 점지는 산신에 빌었다. 이곳 주지봉은 남원시???서 멀지 않아 예로부터 삶에 아쉬움이 있는 군민들은 이곳 주지봉에 빌어 바라는 바를 이루었다. 그래서 가뭄이 들때는 주지봉 정산에 기우제를 올려 효험을 보는 일이 많았으므로 관·민 할것 없이 남원군민의 기도단으로서 유래가 깊다. 이곳 기도단에 처음으로 암자를 세운 이는 김세평(金世平) 부사인데 김부사는 숙종(肅宗) 20년(1694)에 남원부사로 도임하여 군민들이 영험을 본 기도단을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여 여러 사람들과 뜻을 합해 이듬해 암자를 세워 주지암(住智庵)이라 하였다.
  • 김세평 부사는 선원사를 중창한 것으로도 이름이 전하고 있지만 그는 이밖에도 향리에 남긴 일이 많다. 그후 주지암은 1912년 이혜능(李蕙能) 주지가 크게 수리하였는데, 이때 불상을 충청도 홍산에 있는 무량사(無量寺)에서 모셔왔다. 그런데 수년 전에 이 절이 주지의 부주위로 촛불이 넘어져 불당이 모두 타 버렸다가, 1978년 김양선(金良璇) 주지의 정성어린 노력으로 불당이 재건되었다. 동쪽에는 백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암굴이 있어 옛부터 기도소로 유명하다. 정상에서는 날씨가 맑을 때 멀리 남원시와 곡성지방까지도 한눈에 볼 수 있다. 암벽 정상에는 가로 세로 1m 크기의 평평한 바위가 바둑판 모양을 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옛날 산신들이 이곳에 내려와 바둑을 두며 놀았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봉화대 역할로 깃발을 꼿아 남원과 운봉을 잇는 신호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남쪽으로 50m지점에서 주지암(住智庵)이라 새긴 창건 당시의 표시판이 근년에 발견 되기도 하였다.
옥터
  • 형옥터 : 동천리 운봉초등학교 남동쪽 주택지
  • 옥 터 : 공안마을 앞 옛 공안림 터에 있었으며 기와조각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 옥터거리 : 인월마을 입구 옛 죄인을 수감하던 '터거리'의 이름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