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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읍 행정복지센터

운봉읍 전설

비전마을 전설
군화동
  • 1961년 대홍수때 소멸된 화수리 이재민들의 가옥을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13가구를 건립하였는데, 이주 후 마을 이름을 '군인들이 만들어준 화수마을'이란 뜻으로 군화동(軍花洞)으로 부르게 되었다. 군화도은 황산대첩을 이룬 황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지리산 산신과 노구할머니
  • 고려말엽 왜구가 우리나라 동해와 남해를 침범하여 노략질과 약탈을 일삼을 무렵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왜구를 격퇴한 사실들이 전설로 다수 전해 오고 있다.
  • 그 중 이성계장군의 황산대첩은 유명한 역사적 승전이다. 그런 고로 이 황산대첩과 관련된 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피바위에 대한 전설 인월 지명에 대한 일화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 왜구의 노략질에 대처하기 위해 조정중신과 백성들이 힘을 합하여 국토를 수호하려는 데는 이 나라의 천지신명(天地神明)까지도 도왔다는 이런 전설들에서 우리는 흐뭇한 호국정신(愛國精神)을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왜구의 노략질이 잦아지자 이성계장군은 북쪽에서 국경을 방어하고 있던 이성계장군을 정왜원수(征倭元帥)로 삼아 운봉에 급파하였다. 나라의 명을 받은 이성계 장군은 활 잘쏘는 병졸 수백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달려와서 운봉 황산에서 진을 치고 왜병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한편 왜장 아지발도에게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아지발도가 소년대장으로 고려를 치러 간다는 말을 들은 그의 누이가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 "고려를 치려거든 부디 황산을 조심하라."
  • 이 말을 들은 아지발도는 누이의 말에 오히려 노기를 띠고 소리쳤다.
  • "장부가 출정하는데 누님은 그 무슨 요망한 언사요. 황산이고 뭐고 내가 가는 곳에 무슨 대적이 있으리요."
  • 이렇게 호기 있게 소리치고 출정했지만 아지발도도 은근히 누이의 말이 걸리는 바가 있었다.
  • 남해안으로 상륙한 아지발도는 전진해 마산 진주 등의 평야에서는 무심히 진격해 오다 하늘에 높이 솟은 지리산을 쳐다보고 산청땅을 들어서니 산악의 험준한 기운에 정신이 압기(壓氣)를 받았다. 그러자 마음 속에 꺼림칙하게 남아 있던 황산을 조심하라는 누이의 말이 생각났다. 아지발도가 산세를 살피며 행군하다가 보니 길가에 호호백발 노구(老軀)할머니가 짤막한 쇠막대기를 짚고 걸어간다. 아지발도는 나이 많은 늙은이들은 지형, 지세, 지명에 대해 잘 알 것이라 생각하고 행군을 잠시 멈추고 물었다.
  • "여보시오 할머니, 고려에 황산이란 산이 어디에 있습니까?"
  • 할머니는 아지발도를 흘낏 보더니 쇠막대기로 산청 왕산을 가르키며 대답했다.
  • "저 산이 왕산이라는 말 들었으나 이 쇠막대기가 이렇게 닳도록 팔도강산을 주름 잡아 다녔어도 황산이 있다는 말은 듣느니 처음이요."
  • 아지발도는 이 말을 듣고 오래 고민하던 수수께끼가 풀린 듯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 '옳다, 이제는 의심할 것 없다. 거침 없이 진격하는 것이다.'
  • 그렇게 생각하고 군사들을 재촉하여 함양을 불사르고 팔량치(함양군과 남원군 사이에 있는 재)를 넘어 운봉에 황산이 있는지는 묻지도 않고 황산 밑으로 덤벼들었으니, 이성계장군의 번개 같은 화살에 '황산대첩의 피바위'라는 전설을 남기게 된 것이다.
  • 이 때 노구할머니는 지리산신이었다고 한다. 이 전설에는 나라를 지키는 우리 군사의 무운을 빌고 천지신명도 국토를 수호한다는 우리의 호국사상(愛國思想)이 잘 나타나 있다.
윤흥태수와 거문고
  • 삼국유사 제 4절 헌강왕 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경주 성중에는 초가집을 볼 수 없고 기와집이 연이어 섰으며 밤과 낮으로 노래소리가 그치지 않느니라. 또한 경주 시내에서 해변에 이르기까지 기와집이 즐비하되 초가집은 볼 수 없고 길거리에서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더라.'
  • 이로 본다면 통일이후 신라는 차차로 사치와 유흥에 빠져 온 국민이 노래와 춤으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이때 악성(樂聖) 옥보고가 있었다. 옥보고는 자신의 음악이 사치와 유흥에 이용되는 것을 보고 경주를 떠나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니 경주의 왕실과 귀족들은 귀중한 보물을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을 느꼈다. 그래서 옥보고를 다시 불러내려고 했으나 옥보고는 지리산 어디로 사라졌는지 종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지리산에는 스승을 찾아 입산한 옥보고의 제자 귀금이 운상원에 있었다. 귀금은 옥보고의 제일 가는 제자로 옥보고의 음악을 전수받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 할 수 없이 왕이 윤흥을 남원태수로 임명, 운상원에 숨은 옥보고의 제자 귀금의 거문고를 전수 받으라는 왕명을 내렸다.
  • 윤흥은 남원에 부임하는 즉시 음악에 소질있는 미모의 소년 청장과 안장을 뽑아 운상원 귀금에게 파견, 거문고를 배워 오도록 하였다. 두 소년은 수년간 운상원에 머물러 귀금의 거문고를 배운 후 돌아와 태수에게 보고했다.
  • "귀금이 심오한 비곡은 가르쳐 주지 않더이다."
  • 이에 윤흥 태수는 산해진미로 푸짐한 이바지 음식을 마련하고 부인을 동반, 귀금을 찾아가 부인으로 하여금 술을 따라 권하게 하는 하편, 큰 절을 올리며 간곡히 말했다.
  • "군왕이 나에게 남원태수를 명하심은 오직 선생의 비곡을 배워오라 함이거늘 3년이 넘도록 그 묘기를 얻지 못하니 무엇으로 군왕을 대하겠습니까? 듣자하니 숨겨놓은 곡조가 있다 하니 청컨대 가르쳐 주십시오."
  • 귀금은 태수의 진실에 감동되어 표풍곡 3곡 등 숨겼던 비곡을 전수하니 안장은 이를 배워 아들 극종에게 전하고 극종은 따로이 7곡을 지어 거문고를 후세에 전하였다.
명석치에 얽힌 유래
  • 운봉 여원치를 올라서면 운봉의 물줄기가 모두 합류하여 흘러 나가는 좁은 목을 마치 움켜쥐듯 지켜선 황산(荒山)이 있다. 바로 호남과 영남의 관문인 이곳 길목은 예로부터 왜구나 조정 반란군을 진압하던 요새지이기도 하였다. 황산 오른쪽 물줄기를 건너 맞은 편으로 해발 1,150 m의 덕두산이 천혜의 요새지인 운봉 길목을 마주 지키고 있다. 황산은 695m의 비교적 낮은 산이지만 지리적으로 호.영남의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 만큼 많은 전란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 황산을 사이에 두고 현재 남쪽에는 포장된 아스팔트 길이 훤히 뚫려 있고, 반대쪽인 서북쪽에 지금은 사람들이 겨우 오갈 정도의 소롯길이 있다. 이 곳을 사람들은 울도치, 또는 명석치라고 부른다. 옛날의 우리나라 도로 사정은 우마차가 다닐 수 없는 좁고 구불거리는 소롯길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가장 편리한 길은 역시 빠른 지름길일 수 밖에 없었다. 옛날부터 울도치는 운봉과 동면의 사창 부락과 인풍리 등지 사람들이 남원을 오가는 중요한 지름길이었다. 지금도 폭이 2∼3m가 넘는 옛날 길의 흔적이 보인다. 운봉 황산 대첩비지에서 현재 오씨와 정씨 두 집이 살고 있는 양지촌을 지나 방현 쪽으로 100여 m 정도 올라가면 정유재란 때 민씨의 열녀비를 만난다. 그 곳에서 오른쪽 양지제 길을 자동차로 오르다보면 왼편에 파평윤씨 제각 '명석재(鳴石齋)'가 있고, 다시 200여 m 더 오르면 고개 정상 부근에 20여 년간 살다가 지난해 타계한 유씨의 외딴집이 보인다. 그 집 왼 편 고개 정상에는 길 양편에 큰 바위가 대문 지주처럼 놓여 있다. 이 고개 마루에 서면 남쪽으로 지척에 황산의 가파른 봉우리와 북쪽에 아곡리 천황산 줄기가 성벽처럼 가로 막고 있다. 동쪽으로 아영과 동면의 넓은 들은 물론 팔랑치 고개를 훤히 관망할 수 있다. 또한 서쪽으로는 운봉 들녁과 여원치를 멀리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늦은 봄과 한겨울에 남원과 함양쪽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이곳 높은 재에서 바위와 부딫혀 소리 지르며 멈추곤 한다.
  • 때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잦아 백성들의 재산과 피해가 말로 다 할 수 없던 때였다. 우왕 6년(1380) 8월 추수가 거의 끝나갈 무렵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대마도를 출발한 왜구는 진포로 상륙하였다. 허술한 해안 방비 탓으로 무인지경처럼 우리 국토로 쳐 들어온 왜구는 충청·전라·경상도 연해 지역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살상하여 그 참상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최무선을 토벌 대장으로 삼아 파병하였다. 최무선은 고려의 우수한 화약 발명술을 이용한 화포로 500여 척의 왜구 함선을 불태웠다. 배를 잃은 왜구들은 육지로 도망하였는데 이 왜구들은 잔여 세력을 규합하여 상주·함양 등지를 휩쓸며 더욱 악랄한 분탕질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함양 동쪽 16리 사근내 역까지 진출하여 진을 쳤다. 이 때 왜구의 숫자는 수천 명을 헤아렸다.
  • 조정에서 서둘러 파병한 배극렴 등 여러 장수가 이곳 왜구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500명의 군사와 두 명의 장수가 전사하는 패배를 당하였다. 사기 충천한 왜구는 그해 9월 남원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물러나 운봉현을 불사른 뒤 인월역에 진을 치고 있었다. 더구나 이들은 "장차 광주 땅의 금성(담양)에서 말을 먹인 후 곧 북상하리라"는 소문을 냈다. 나라 안팎의 민심은 더욱 흉흉하였다. 마침내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 장군으로 하여금 적을 섬멸토록 파병하였다. 이성계 장군은 고려군과 귀화한 여진족으로 편성된 1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배극렴과 남원에서 합류한 뒤 여원치를 넘어 운봉의 황산 서북쪽 울도치에 도달하였다. 고개 마루에는 크고 작은 바위와 돌들이 많이 쌓여 있었다. 이성계 장군은 이곳 고개 마루에서 돌무더기를 쌓아 진을 치고 적정을 살펴보았다. 수천의 적은 인월역에 진을 치고 일부는 황산 기슭에 복병을 숨겨 놓은 듯 하였다. 그동안 여러 곳을 약탈하며 고려 산세를 익혀둔 적은 황산을 이용해 군세를 잘 정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성계 장군도 쉽사리 적을 공격할 수 없었다. 이쪽의 방비를 튼튼히 하면서 적의 헛점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군사 전략회의를 마치고 잠을 자던 이성계 장군의 꿈에 쌓아둔 바위들이 통곡을 하며 울어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바위가 울며 통곡을 하다니? 바위들은 장군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 "장군님, 지금 장군님은 무엇을 망서리고 계십니까? 인월에 진을 친 적들은 우리 죄없는 백성들을 마구 살상하며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왜적의 장수가 어린 아이를 잡아다 배를 갈라 내일 승전의 제물로 제사를 지내는가 하면, 어린 아이와 성인 남자의 귀나 심지어는 국부를 소금에 저려 본국으로 보내는 등 천인 공노할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또한 겁탈당한 부녀자가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하였습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적정만 살피고 계시니 그동안 늘어나는 우리 백성의 피해는 어찌하겠습니까. 이렇듯 지체해서는 죄없는 죽음만 늘어나게 됩니다. 이제 우리들이 적을 막아낼 것이니 내일 당장 출전하소서."
  • 장군은 간밤의 꿈을 기이하게 여기며 전략에 골몰하였다. 그러다가 새벽녁 참모들을 집합시켜 오늘의 일진을 보도록 하였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퉁두란을 시켜 100보 앞 바위 위에 투구를 놓아두게 하였다. 그리고 유엽전(화살) 3개를 뽑아 하나씩 투구를 향해 쏘았다. 세 개 모두 백발백중이었다. 전투 일진이 좋다고 판단한 이성계 장군은 공격을 명령하였다. 진군하던 군사들은 지금의 사창마을을 지났다. 사창은 이미 약탈 당하고 비어 있었다. 왜구는 창고에 들어 있던 모든 곡식을 가져다 군량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계 장군은 사창마을 앞 우뚝 돌기한 앞산에 올랐다. 지금의 정산봉(鼎山峰)이다. 서무리 너머로 왜구의 진지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군사들에게 명하여 솥을 걸어 아침을 짓도록 하였다. 후에 이 산의 이름이 솥정(鼎)를 쓴 정봉(鼎峰)이 된 연유이다. 정봉에서 식사를 마친 이성계 장군은 전군에게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우리 군사들은 왜구에 대한 분노로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마자 물밀 듯 왜구를 향해 돌진하였다.
  • 이 날 이성계 장군은 다리에 화살을 맞고 말이 거꾸러지는 등 여러번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서 결국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을 거두었다. 적장 아지바두는 퉁두란과 함께 이룬 협공(協攻)으로 전사하고 적군은 오합지졸이되어 이리저리 쫒기다가 거의 전멸하고 70여명 만이 지리산으로 도주하였다. 황산천은 피로 물들어 물을 떠서 7일 동안 가라앉힌 뒤에야 식수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바위마저 붉게 물들어 오늘날 피바위(血岩)를 만들었다.
  • 수천명이 넘는 적의 시체는 아영면 봉화산에서 흘러 내리는 풍천의 서쪽과 동쪽에 묻었다. 그래서 지금의 서무(서무덤)와 동무(동무덤)의 지명이 생겨났다. 대승을 거둔 그날밤 이성계 장군의 꿈에 바위들이 또 나타나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하였다. 전날 밤에 일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침착하게 물었다.
  • "이번에는 무슨 일로 이렇게 내 심기를 어지럽히느냐?"
  • 장군은 의아해 하며 소리쳤다.
  • "장군님의 지략과 용맹으로 왜적을 물리쳐 우리 백성이 편안해졌습니다. 다만 장군님의 승리로 우리들의 역할을 다하지 못함을 한탄하여 이렇게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충정을 헤아리소서."
  • 그래서 이 고개를 돌이 울부짖는다 해서 '울독치' '웃도치' '명석치'라 명명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많은 전란을 당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이곳 바위들이 밤새 울었다고 한다.
  • 지금도 명석치 정상에 서면 여원치를 넘어오는 바람과 함양을 거쳐 매치를 넘어오는 바람의 거센 바람소리가 조석으로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 고개에서 아영면 방면으로 내려다 보이는 마을을 인풍리라 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지봉유설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나던 해에는 피바위에서 피가 흘렀다고 한다.
황산 석정과 당월리 장사
  • 해발 697m의 황산은 주변의 높은 산에 비해 작은 산이지만 고려시대 이래 많은 역사적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 때문이다.
  • 과거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중요 통로였던 현 24번 국도가 경유하는 이곳은 왜구의 침입을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황산은 고려 우왕 6년 (1380) 9월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 당시 왜구를 물리친 전적지로 유명한 산이다. 당시 이성계 장군이 동쪽 사창 부락 앞에 우뚝 돌기한 정산봉에 올라 인월에 진을 친 왜구의 정황을 살폈는데, 정산봉이라 불리게 된 것은 대형 솥을 걸고 군사들의 밥을 지었다 해서 솥정(鼎)자를 써서 정산봉(鼎山峯)이라 칭하였다 한다.
  • 특히 정산 부근에 유명한 운성 10경 중의 하나인 '황산석정,이 있는데 과연 근자의 혹심한 가뭄으로 산 아래 우물물이 말랐는데도 이 곳 우물은 고지대인데도 물이 조금도 줄지 않았다. 윗 쪽 정상 부근에 또한 건룡쏘가 있다. 이곳은 물이 마른 깊은 쏘인데 전에는 이곳에서 물을 길어 군사들의 식수로 사용하였고 물이 어찌나 깊었던지 한 번 빠지면 저 아래 용계마을 앞 용추(용쏘)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이렇게 수량이 풍부했던 쏘의 물이 마른데 대한 전설이 있다.
  • 옛날 지금의 사정(射亭) 동편에 지금은 소멸된 당월리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은 가축을 도축하는 이른바 백정들이 사는 천민 부락이었다. 그 부락에 늠름한 청년이 하나 있었는데 이 청년은 겨드랑이에 용비늘을 가진 상서로운 인물이었다 한다. 이 청년은 자신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황산 정산에 있는 건룡쏘에 와서 물을 마시며 몸을 단련하였다. 그러자 이를 알게된 조정에서 명을 내려 그 청년을 불경(不敬)과 역적의 죄명으로 처형하였다. 그 후 쏘는 물이 말라 건룡쏘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부근에 군사들의 훈련 장소인 진대가 있으며, 정상 서쪽으로 왜구를 치기 위해 쌓은 돌이 임무를 다하지 못해 통곡하였다는 울도치(명석치)가 있고, 산 아래 천변에 왜구의 피로 물들인 피바위와 왜구의 시체를 묻은 서쪽 무덤(서무듬-서무리)과 동무듬(동무)이 있다.
  • 또한 이 주변의 지명들도 그 유래가 전해지는데, 황산 전투에서 해가 지자 전투를 유리하게 하기 위해 달을 끌어 올렸다 해서 인월리(引月里)와 바람을 끌었다 해서 인풍리(引風里), 새벽닭을 울게 했다 해서 용계(龍鷄)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한다.
옥보고의 거문고
  • 운봉은 국악의 고장이라 할 만한 역사적 기록을 간직하고 있다. 750년경(신라 경덕왕 35년)거문고의 대가 옥보고는 운상원(운봉)에 들어가 50년 동안 거문고를 익혔다 한다. 옥보고가 운상원에 은거하자 신라의 국악이 두절될까 염려한 왕은 왕족 윤흥을 남원 태수로 임명하여 옥보고의 거문고가 끊이지 않도록 노력하라 일렀다.
  • 그러나 윤흥이 부임하였을 때는 옥보고는 이미 죽고 그 뒤를 송명득과 귀금이 그 기능을 전수받고 있었다. 윤흥 태수는 하는 수 없이 청장과 안장 두 악동을 귀금에게 보내어 거문고를 배워 오도록 하였다. 국악의 고장답게 조선 순조때 화수리 출신 명창 송흥록, 박초월등과 함께 동천리 출신 박노년이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