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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읍 행정복지센터

운봉읍 전설

서하마을 전설
운봉의 줄싸움
  • 이 싸움은 운봉에서 오랫 동안 전해오던 민속놀이이다.
    이것은 본래 이곳 박씨들의 친목적인 편싸움 놀이인데 싸움에 앞서 동아줄을 만드는 일이 거창하다. 그 줄의 길이가 운봉교에서 시작하여 시장을 넘어 장대의 옛터까지 뻗쳤다 하니 자그마치 500m가 넘는다.
  • 줄의 크기는 원줄은 어른의 한아름이나 되게 하고, 이 원줄에서 중간줄이 갈라지고 중간줄에서 또 작은 애기줄을 잇는다. 그러면 그 모양이 마치 이탈리아 포푸라나무 가지처럼 원기동 줄에 작은 줄이 주렁주렁 달리게 되는데 이 새끼줄은 어른이 한 주먹으로 쥘 정도만하다.
  • 이렇게 하여 동아줄이 완성되면 운봉박씨들이 그 살고있는 위치에 따라 동편 박씨와 서편 박씨의 두편으로 나뉘어진다.
    이때 동·서 양편의 박씨들은 운봉 읍내 뿐만 아니라 운봉 관내 4개 면의 박씨들은 물론 멀리는 남원, 함양, 진주에까지 연락을 하여 운봉의 박씨들의 연고자들이면 모두 동원이 되었다 하니 실로 대대적인 행사를 치루어 왔다.
  • 그리하여 일년 중 가장 한가한 음력 정월 대보름녁에 이 놀이를 하게 된다. 그밖에 운봉읍내에서는 응원과 구경을 하기 위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의 다 모인다.
    이렇게 해서 준비가 다 되면 양편 줄다리기 하는 장정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수백동의 술을 현장에 갖다놓고 자기편에게 술을 권하는데 너무 취하지 않도록 알맞게 마셔야 한다. 그리고 이때 마시는 술은 동편, 서편이 서로 네것 내것이 없다.
  • 줄의 한가운데는 아름드리 큰 목나무를 꽂아 표준을 삼은 다음 양편에서 한사람 씩 심판이 나오고 모여든 남녀노소들의 하늘을 찌를 듯한 응원을 받으며「영치기 영차」하고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한참 힘을 주다가 목이 마르면 누구나 자유로이 술을 마신다. 그런데 이런 경우 인원을 제한하기가 어려우므로 어느 편이든 더 많은 장정을 동원하는 쪽이 이기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양편은 싸움이 있기 여러날 전부터 우선 사람을 많이 출동시키는데 전력을 다한다.
  • 이렇게 해서 줄다리기의 승부가 결정되면 지는 편에서 이날의 술값은 부담하되 대개는 뜻있는 독지가가 단독으로 부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몇 사람이 공동으로 술값을 부담하고 여러 사람에게 그 폐를 끼치지 않는다.
  • 이 놀이는 운봉면민의 단결심과 강한 투지를 기르는 것이 목적이며 처음에는 동편 박씨와 서편 박씨의 놀이였으나 나중에는 이고장 전체의 향토적 민속놀이가 되어 전 주민들이 이 놀이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국민학교에서 가을이면 보건대회를 할 때 다채로운 마을 대항 행사가 있으므로 이 행사는 점차 없어졌다고 한다.
봉낙골집 며느리
  • 때는 그 지독한 기묘년(1939) 흉년.
  • 일제의 피맺힌 수탈과 압박 속에서 하루하루를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고 근근히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배를 주리며 보릿고개를 간신히 지탱하고 여름 한낮 땡볕에 땀흘려 겨우 지은 농사는 가을걷이를 끝내기가 무섭게 공출로 모두 빼앗기고 사람들은 이제 짓던 농사도 기피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래 해마다 피와 잡초만 무성한 논밭이 늘어 가니 당연히 요구하는 공출량은 채울 수가 없게 되었다.
  • 그러자 운봉 주재소에서 파견한 일본 순사는 근동에 사는 면서기를 대동하고 부족한 공출을 메꾸기 위해 숨겨둔 곡식을 색출하기 시작하였다.
    굶어 죽지 않으려고 독에 벼를 넣어 몰래 뒤안 땅 속에 묻어 둔 비상 식량을 쇠꼬챙이로 쑤셔 파내가거나, 그것도 여의치 못하면 무고한 동네 사람을 다짜고짜 잡아다 매질을 하여 숨겨 놓은 잡곡을 토해내게 하는 등 당시 일제의 모진 수탈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하루 하루를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 한숨만 짓던 주민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톱과 낫을 들고 산으로 올라 아름들이 소나무를 마구 베어 넘기고 소나무 껍질의 속살을 벗겨내어 식량을 대신하였다.
    소나무 껍질도 큰 소나무 껍질이 덜 질겼다.
    이렇게 산에서 벗겨온 소나무 속살을 솥에 삶아 빨래 방망이로 몇차례 두들겨 떫은 물을 울거내어 바싹 말린 다음 돌절구에 찧어 얼게미(체)에 쳐서 만든 생키가루로 조금씩 죽을 쑤어먹고 덜 빻아져 체에 남은 것은 다시 물에 불겨 방망이로 더 두들긴 다음 다른 잡곡과 함께 국을 끓여먹곤 하였다.
    또한 험한 지리산 앞산에 주린 배를 끌어안고 종일 주워모은 도토리를 햇볕에 말려 디딜방아에 찧어 쑥과 함께 시루에 쪄 먹거나 무우에 섞어 밥을 해먹곤 하였다.
    그러니 자연 사람들은 부황이 들어 얼굴은 붓고 꼴은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봄철 보리마져 흉년이 들면 굶어죽는 사람이 부지기 수였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아가는 나날이었다.
  • 그런 어려운 시절에 운봉읍 장교리 진씨 집안에 계모와 함께 힘겹게 살아가는 복실이라는 처녀가 있었다.
    친모는 복실이와 아들 둘을 낳았으나 막내를 낳고 나서 산후 조리가 부실하더니 시름시름 앓기를 몇 해, 복실이가 10살 되던 해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맏딸인 복실이는 슬픔은 컷으나 천성이 착하여 홀아버지와 어린 동생 둘의 뒷바라지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엄동한설에 냇가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는가 하면 남의 집 일을 돕고 밥을 얻어 두 동생들의 주린 배를 채웠다.
    그렇게 어려운 생활을 하던 중에도 불행은 겹쳐 어느날 첫째 동생은 산에 칡뿌리를 캐러 갔다가 친구 아이가 잘못 휘두른 괭이자루에 뒷퉁수를 맞아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러나 상처에 약 한번 써 볼 형편이 아니었다.
    덧난 상처로 시름 시름 앓던 동생은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둘째는 장마철 운봉국민학교에서 돌아오는 도중 선두숲 냇가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떠내려가 죽었다.
    밥 굶기를 밥 먹듯하여 야윈 몸에 빈혈과 함께 그만 불어난 물쌀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 그 뒤 아버지는 새 엄마를 얻어 아들 둘을 낳았다. 식구가 둘이 늘었다.
    계모는 14살 복실이를 권포리 봉낙골 산지기 박씨집으로 시집을 보내기로 하였다.
    말이 좋아 시집이지 친정에서는 어려운 살림에 밥 한그릇이라도 줄여보자는 심산이고, 시집에서는 힘든 살림 일손이나 늘려보자는 심산이 궁핍한 시절의 일반적인 사정이었을 것이다.
    복실이는 시집에서 시부모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을 하였다. 시댁도 다른 여느 가난한 집처럼 살기가 힘이 들었다. 집에 있을 때보다 굶주림은 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처녀 때보다 할 일은 더 고되고 어린 나이에 시집살이는 서툴 수 밖에 없었다.
  • 날이 갈수록 복실이는 야위어가더니 어느날 그만 병이 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한끼 먹기도 어려운 때에 그나마 몸져누워 남편과 시부모에게 여간 죄송한 게 아니었다. 죄송하다기보단 시댁 식구들의 눈치를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댁도 어려운 처지는 마찬가지였으니 약 한첩 쓸 수 없어 병은 더욱 깊어가기만 하였다.
  • 그런 어려운 중에도 남편은 복실이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남편은 복실이가 모져 눕자 지친 자신의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밤낮으로 혼신을 다해 병간호를 하였다.
    없는 살림에 시댁 식구 모두가 병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다 하였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 복실이가 병으로 눕자 시댁의 살림은 더욱 쪼달리고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 시름에 잠긴 복실이는 어찌해야 할 지 몰랐다. 친정이 그리워지고 아버지가 보고싶어 눈물만 흘렸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시댁 식구 모두가 집을 비웠다.
    시부모는 같은 마을 노인이 상을 당하여 그 집에 가고, 남편은 둿산에 놓아둔 토끼덫을 살피러 간 것이다.
    복실이는 결심을 하고 아픈 몸을 겨우 가눈 채 장교리 친정집으로 향했다. 더이상 시집에 짐이 되기보다는 그래도 자신의 처지가 덜 부담스런 친정집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 겨울의 살을 에이는 추위와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을 헤치고 한나절이 다 지나 가까스로 장교리 친정 집에 당도하였다.
  • 병이 들어 집에 돌아온 복실이를 계모인들 달가울 리가 없었다. 계모는 출가외인이라는 명분으로 시댁으로 돌아가도록 강요하였다.
    채 하루도 쉬지 못한 복실이는 할 수 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시름에 잠겨 시댁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눈 속을 헤치고 가까스로 독골재 새방죽까지 당도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고개 마루에서 산속 외딴집 시댁의 희미한 호롱불빛이 멀리서 가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복실이는 죄스런 마음에 시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오던 길은 깜깜한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하루종일 굶어 지친 복실이는 시댁 불빛이 보이는 고갯마루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어린 신부의 영혼을 달래기나 하듯이 하얀 눈이 밤새 내렸다.
    복실이의 주검은 며칠 뒤 아랫마을 나뭇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마땅히 묘를 쓸만한 자리가 있을 리 없는 시댁에서는 어린 복실이가 죽은 그 자리에 흙을 파고 묻었다.
  • 그 후 고개를 오가는 사람들이 복실이의 깊은 마음을 애도하여 무덤 옆에 던진 돌이 쌓여 성황단이 되었다.
  •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홀아비 박씨는 몇년을 홀로 살았다. 박씨는 슬픔이 너무 커서 새장가를 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박씨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 나타난 복실이는 박씨에게 말하였다.
  • '서방님 제 할일을 못하고 먼저 간 저를 용서하세요. 후일 저승에서나마 서방님을 다시 만나 지성으로 모시겠습니다. 대신 이승에서 새 배필을 만나게 해드리겠으니 따르도록 하세요.'
  • 권포 마을에는 산동면 달매(월산리)에서 시집 온 강씨 며느리가 있었다.
    그 며느리는 남편의 잦은 바람끼 때문에 산동면 달매로 자주 친정 나들이를 하곤 하였다. 친정을 갈 때는 봉낙골을 지나야 되었다.
    어느 봄날 오후 마루에 앉아 잠시 쉬던 박씨 모친은 설음에 겨워 친정집으로 가는 강씨 며느리를 보았다. 소문을 들어 그 처지를 잘 알고 있는 박씨 모친은 그날 따라 강씨 며느리와 세상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집 앞에서 강씨 며느리가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박씨 모친은 잠시 쉬어가기를 권했다. 바쁠 것도 없는 강씨 며느리는 박씨 모친이 이끄는 대로 방안에 들어가 한탄하듯 늘어놓는 강씨 며느리의 세상 푸념을 들었다.
    어느덧 저녁해는 서산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나무하러 간 아들 박씨가 돌아왔다.
    한숨을 쉬며 그만 가야겠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강씨 며느리를 박씨 모친은 늦었으니 자고 내일 떠나라고 한사코 말렸다.
    그날밤 박씨 모친은 아들 박씨와 강씨며느리를 한방에 밀어넣어 문을 잠가 며느리로 삼았다.
  • 그 뒤 박씨 부부는 금슬이 좋아 몇 년 동안 살림을 불리더니 전주로 이사하여 부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제 할일을 다하지 못하고 성황단에서 굶어 죽은 복실이가 시댁에 못다 한 복을 저승에서나마 베풀고자 하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봉낙골 고개 위 성황단 묘자리가 보기 드문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