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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읍 행정복지센터

운봉읍 전설

장동마을 전설
여원치산신각
  • 운봉 여원치 정상을 지나 남원 쪽으로 200m쯤 되는 도로 밑 남쪽으로 향한 바위에 좌상인지 입상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불상이 하나 새겨져 있다. 높이 2.42m, 어깨폭 1.09m로 머리에는 두광을 음각하였다. 이 마애불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하나 여래상의 사연을 새긴 마애비에는 여상이라고 적고 있으며 내용인즉 이성계가 황산대첩에 임하여 이곳에서 길가는 노파의 계시를 받고 대승하자 바로 산신이 노파로 변신한 것이라 하여 불각을 짓고 봉신하게 되었다는 줄거리가 담겨 있으며 비문이 새겨진 시기는 1901년 7월(광무 5년)으로 되어 있다.
  • 한편으로는 인월리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구에게 겁탈 당한 여자가 오른쪽 젖가슴을 잘라 자결한 뒤 원한을 품고 산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이성계 장군으로 하여금 원수를 갚게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래서 불상의 오른손이 젖가슴을 가리고 있다고 한다.
지리산 정기로 된 주지암
  • 주지암은 신라때부터 있어온 고찰이라 하는데 전한 바에 의하면 지리산 줄기가 이곳에 멈춰 조그만 산을 이룬지라 이름을 주지봉(住智峯)이라 하였는데 지리산 산신의 영험이 이어져 신기로운 일이 많았다고 한다.
  • 우리 고대 풍속에 소원이 있으면 산신께 빌었는데 이곳 주지봉은 남원시에서 멀지 않으므로 옛부터 소원이 있으면 시민 부녀자들이 이곳 주지봉에 기도하여 바라는 바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가뭄이 계속되면 관가에서도 주지봉 정산에 기우제를 올려 효험을 보았다 하니, 말하자면 관·민 할 것 없이 옛날 남원 백성의 기도처로 유래가 깊다.
  • 이곳 주지암도 정유재란 때 소각되었는데, 그후 기도단 밑에 다시 암자를 세운 이는 서기 1695년 부사 김세평이다. 그는 시민들이 주지봉 기도단에 기도를 드려 많은 소원을 성취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리고 이처럼 신령스런 기도단을 그대로 허술하게 둘 수 없다는 생각으로 시민들의 여론에 따라 자그마한 암자를 세워 주지암이라 이름지었다.
  • 그 후 서기 1912년 이혜능 주지가 암자를 크게 수축하였는데, 이때 불상은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에서 모셔왔다. 그러다가 10여년 전 주지가 불당에 촛불을 켜놓은 채 밥을 먹고 있을 때 촛불이 넘어져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한 것을 후에 다시 암자를 세웠다.
  • 주지암 동쪽에는 100여명이 들어갈만한 큰 암굴이 있고 이곳 역시 옛부터 기도소로 쓰여왔다. 산정에는 암석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바, 암상에는 바둑판이 그려져 있으니 옛날 선비들은 산정에 올라가 고요히 바둑을 즐긴 모양으로 자연을 벗삼은 옛 사람들의 고상한 풍취를 엿볼 수 있다.
  • 전설에 따르면 신선들이 내려와 바둑두고 놀던 곳이라 하지만 그것은 선비들 노는 것이 신선처럼 보인데서 꾸며진 이야기인 듯 하다.
여원재에 얽힌 전설
  • 남원에서 함양으로 통하는 24번 국도를 따라 동북쪽으로 10킬로 쯤 되는 곳에 해발 485미터의 여원치(여원계곡)가 있다. 현재 운성대장군이 서 있는 이곳에서 동쪽으로 지리산 자락이 이어져내려온 1304 미터의 고리봉과 세걸산. 바래봉. 황산이 있고, 남쪽으로 바로 지척에 장기바우를 머리에 이고 있는 주지산(일명 신선봉)이 우뚝 서 있다. 북쪽으로는 삼한시대 때 축성한 장교산성(방학산)과 고남산성(고남산)이 있으며, 서쪽으로 남원평야를 바라보면 멀리 시루봉과 그 남쪽으로 양가리 목가마을(나뭇거리)이 보인다.
  • 과거 운봉 사람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수 없이 남원과 운봉 사이를 넘나들며 오가던 이곳 여원재 골은 여원치에서 양가제(陽街堤)를 돌아 양가리 나뭇거리로 통하는 골짜기를 말한다. 나뭇거리를 출발하여 여원재 골짜기를 따라 오르면 양 편으로 산을 깍아 세운 듯한 기암괴석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고 계곡 전체가 울창한 자연림이 우거져 태고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 여원치는 저 아래 남원 시내보다 2-3도의 온도차를 보이는 운봉 고원이 시작되는 곳이다. 따라서 여름의 서늘한 기온 때문에 고랭지 채소와 감자 경작에 매우 알맞은 풍토 조건을 가지고 있다.
  • 과거 이 고개는 호남과 영남의 경계를 잇는 군사적 요충지로써 경제·사회·문화의 중요한 통로 역할을 다하였다.
  • 여원치에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일반 여행객을 위하여 여원치에 '여원'이란 원(여관)을 설치하였다. 여관 건물을 원우(院宇)라 하였는데 이곳 여원 터에는 지금도 암벽에 마애여래상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원우는 사원(寺院)을 개조 혹은 전환한 것으로 짐작된다.
  • 문헌과 전설에 따른 여원재 골의 역사의 흔적은 많다. 먼저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곳은 백제 지역인 남원과 신라 지역인 운봉에 산성을 쌓아 양국이 대치해 오던 국경지대이다. 백제는 초고왕 23년(188)과 무왕 3년(602), 무왕 17년(616)에 각각 신라 모산성(운봉성)을 공격하였으며 백제 동성왕 6년(신라 소지왕 6년, 484)에는 신라를 공격하는 고구려를 신라와 백제 연합군이 이곳 모산성 아래에서 격퇴시키기도 하였다.
  • 지리산 줄기가 멈춰선 주지산 서쪽에 위치한 주지암(住智庵)은 신라때 건립되었으며 정상에 신선이 와서 장기를 두었다는 장기바우가 있다. 이곳은 또한 영봉의 영험이 슬기로운 명산으로 산신제와 기우제를 지내는 기도단으로 유래가 깊은 곳이다.
  • 고려시대에 이르러 우왕 6년(1380) 황산대첩시 안개가 자욱한 이 곳 여원치에서 이성계장군이 행군 도중 백발이 성성한 노파로부터 전승(戰勝)의 날짜와 전략을 계시 받았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 노파는 당시 경남 함양 지방의 미모 단정한 주부였는데 왜장 아지발도가 그녀를 희롱하며 젖가슴에 손을 대니 칼로 왼쪽 젖가슴을 베어 자결한 원신(怨神)이었다 한다. 후에 이성계는 이 백발 노파가 필시 산신령이라 여기고 이를 기리기 위해 노파를 만났던 고개의 석벽에 여상(女像)을 새기고 그 위에 산신각을 지어 보존케 하였다. 따라서 지리산 산신령은 보통 여자로 알려져 있고 이러한 산신령이 사는 곳을 여원(女院)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지리산 산신령이 사는 이곳을 여원치(여원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그 후 광무 5년(1901) 운봉현감 박귀진이 임진왜란 때 소실된 산신각을 복원하고 이 여상(마애여래상이라고도 함)을 새긴 내력을 석벽 옆에 암각문으로 새겼다. 여원터 북쪽에 당시 군사들이 막사를지어 주둔했던 병막동이 있다.
  • 조선시대에 이르러 '난중잡록'에 의하면 임진왜란(1592-1598) 때 왜군과 관군 그리고 명군이 30여 차레에 걸쳐 이곳 여원을 오가며 군사 작전을 펴기도 하였다. 과거 군병 이동지역은 민폐가 심하였고 특히 왜군이 휩쓸고 지나간 운봉현은 임진왜란 이후 한 때 폐현이 되기도하였다.
  • 계사년(1593) 8월 22일 명나라 원군 도독 유정이 지금의 경북 성주 본진으로 돌아가던 중 이곳 여원재에서 자신이 모월 모일 이곳을 지난다는 내용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바위에 새겼다.
  • <만력 22년 갑오 세계 춘월 정왜도독 예장 성오 유정 복과(萬曆二十二年甲午歲季春月 征倭都督豫章省吾劉綎復過)<이 암각은 지금 여원정 아래 계곡에서 운봉 쪽으로 50여 미터 되는 계곡을 향해 옆으로 돌출된 큰 바위에 다른 비문들과 함께 새겨져 있는데, 오랜 풍우에 씻겨 서체를 겨우 알아볼 정도로 마모되어 있다. 그런데 윗쪽으로 100여미터 되는 큰 바위에 좌영장 이민수가 자기 이름과 함께 똑같은 내용의 비문을 개각(改刻)하여 두었다.
  • 속칭 연재라고도 불리우는 이 고개는 또한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남원 접주 김개남(金開南)장군이 이끌던 동학군이 처참하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1894년 9월 운봉의 박봉양(일목장군)이 진주. 함양에서 원병을 받아 방아치(장교리에서 부절리 가말재로 넘는고개) 전투에서 대파하였고, 이어 11월 관음치(가동에서 대기리로 넘는 고개)에서 재차 승리하여 기세를 몰아 남원성 남문을 불지르고 남원 동학군을 패주시켰다.
  • 그러나 우리의 근대사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이 박봉양이란 인물이 추앙될 수 있는 인물인가 하는 판단은 유보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동학 농민군은 당시 봉건 조선이 가지고 있던 모순을 자주적으로 해결해 보기 위한 민중의 궐기였고, 이런 민중의 힘을 분쇄한 것은 피폐한 조선 왕조와 외세인 일본의 군사력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것은 이런 우리의 자주적인 민중의 힘이 꺾여버린 데에 그 큰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이런 역사적인 차원에서 거시적으로 접근할 때, 역사의 한 시점에서 활약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내려져야 할 필요가 있다.
  • 한편 연재의 그 험준했던 아흔 아홉 굽이의 고개도 여러 차례의 도로공사를 통해 말끔히 포장된 지 오래다. 너 나 할것 없이 걸어다녀야 했던 옛날 길손들이 잠시 땀을 식히고 쉬어가던 이곳 여원치. 운봉과 남원, 과거 서로 다른 지역의 경제와 문화와 국경의 통로 역할을 하던 유서깊은 계곡, 여원재 골. 여원치와 큰 주조장(도개집)이 있던 목가마을은 한나절 거리의 남원을 오가며 나무와 베쌈을 팔고 생필품을 교환하던 운봉 사람들에게 그나마 짧은 휴식을 제공하던 유서 깊은 통로였던 것이다. 그래서 힘들게 지고가던 나뭇짐을 내려 쉬곤 하던 이곳 목가 마을을 나뭇거리라 칭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여원치 고갯 마루에는 주막집이 성황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어느 곳도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남바우
  • 남원에서 여원치를 올라서다 보면 남쪽에 우뚝 솟아오른 기암절벽이 여원치 계곡을 깊숙히 내려다보고 있다. 주지봉이다. 예로부터 지리산 산신령이 살고 있다 하여 인근의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기도를 드리던 곳이다.
  • 전설에 의하면 주지봉 꼭대기에 장기바우가 있는데 이곳에서 산신령들이 장기를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민간에서 뿐만 아니라 관에서도 이 영험을 빌어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실제 남원부사 김세평은 조선 숙종 21년(1695) 처음 이곳에 암자(주지암)를 세우고 남원군민의 기도단을 마련하였다. 주지봉은 천왕봉에서 바래봉을 거쳐 이곳에서 지리산의 맥이 멈췄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리산 줄기가 이곳 주지봉에서 멈춘 데는 까닭이 있었다.
  • 여원치를 넘어 24번 국도를 따라 운봉읍을 향해 1km쯤 가다보면 갈마지기 남쪽 도로변에 도로와 인접하여 우뚝 돌기한 바위가 하나 있다. 오가는 사람들을 이 바위를 남바우라 부른다. 남바우의 유래는 도로변에 비쭉 얼굴을 내민 모습이라 하여 난(出)바우 또는 알 모양이라하여 난(卵)바우라고 하나, '남은바우'에서 남바우로 불리었다고 전한다.
  • 먼 옛날 백두산의 줄기가 남쪽으로 내려오다 지리산(두류산)을 만들었다. 지리산 산신은 백두산 산신의 명을 받들어 천왕봉의 바위를 불러다가 노고단과 고리봉을 거쳐 서쪽 방향으로 맥을 뻗혀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백두산의 다른 줄기가 무주를 거쳐 덕유산을 만들고 역시 남쪽으로 세를 뻗히다가 여원치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서로 세를 다투던 두 줄기는 한치 양보도 없이 대치를 하던 차에 이를 본 지리산 산신과 덕유산 산신이 서로 만나 내기를 하게 되었다. 주지봉 날망(꼭대기)에서 장기를 두어 지는 쪽이 길을 비켜주기로 한 것이다. 서로 불러 모으던 바위는 장기 내기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오던 길을 멈추고 기다렸다. 장기 실력은 서로 비슷하여 막상막하였다.
  • 내기장기는 100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끝내 승부를 내지 못하고 무승부를 선언하자 오던 길을 멈추어 섰던 바위들은 제자리로 모두 돌아갔으나 논 수렁에 빠진 남바우는 돌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남았다 하여 남은 바우 즉, 남바우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남바우는 지리산 천왕봉 영험이 서린 곳이라하여 옛부터 독(石)명당이라 불렀다. 그래서인지 누군가 바위 틈에 조상묘를 암장하다 들통이 난 적도 있다 한다.
  • 남바우는 옛날부터 운봉 장날 오가던 사람들이 잠시 쉬어가던 자리로 인근 주민들의 기억에 깊이 남아있는 바위이다. 그런데 1995년도 경지정리 중 주민들의 진정에도 불구하고 수로에 방해가 된다 하여 흔적도 없이 파괴하고 말았으니 아쉬울 뿐이다.
노루젖재 꿀바위
  • 30년 전까지만 해도 운봉 여원재에는 주막이 성업을 이루었다. 그 곳은 운봉 일대에 살던 사람들이 남원 시장으로 나뭇짐이나 겨우내 짜놓았던 베옷 등을 팔러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었다. 새벽 별을 보면서 집을 나선 사람들은 이 여원재 주막에서 아침 요기를 하고 반나절이 걸리는 남원 시장길을 떠나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침 요기마저 걸려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방고개에서 진수러기를 지나 노루젖재로 통하는 지름길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노루젖재라 부르는 이유는 운봉에서 남원이 바라보이는 장교리의 낮은 고개를 넘으면 작은 골짜기에서 흐르는 두 개의 도랑 합류점에 불룩한 봉분이 있고 그위에 누군가의 묘를 써서 그 형???이 마치 노루의 젖모양과 같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하루는 꿀장수가 이른 새벽길을 타고 노루젖재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만 발을 헛디뎌 머리에 이고가던 사기 꿀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꿀통은 발밑 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고 바위는 꿀을 뒤집어 쓰는 꼴이 되었다. 그후 지나다니던 나뭇꾼들이 바위의 꿀을 핥아먹곤 하였다 해서 꿀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는 벌떼가 꿀을 보고 날아들었다하여 벌바위라고도 하고 기름장수가 기름통을 깨뜨렸다해서 기름바위라고도 부른다.
여원치마애여래상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에서 부산∼진주행 국도를 따라 15km 지점 해발 470m 여원치(女院峙) 정상 암벽에 여신상(女神像)이 있으며, 그곳에서 북쪽으로 약 3km 지점에 우뚝 솟아 있는 고남산(古南山)이 있다. 그 고남산의 해발 약 850m 정상에 있는 산신제단은 600년전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왜구를 정벌할 때의 유적으로 남아 있다.
  • 여러 문헌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왜구가 역사적으로 우리 나라를 처음 침공한 것은 신라 내물왕(奈勿王) 43년부터였었다. 왜구는 이로부터 수백 차례에 걸쳐 우리 나라를 괴롭혔다. 왜구는 호남 곡창지대를 침범한 후에 전주(全州) 공주(公州)를 거쳐 서울까지 진격할 계략하에 고려 우왕(愚王) 6년(1380)에 부산·진주·함양을 거쳐 남원군 동면(東面) 일대를 점령, 상군리(上軍里), 중군리(中軍里), 소군리(小軍里), 인월리(引月里)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왜구의 부장에는 당시 나이 15세에 불과한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선봉장이 되어 닥치는 곳마다 살인·방화·약탈·파괴 등 갖가지 만행을 부리며 이 땅을 짓밟고 북상하고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를 크게 걱정한 나머지 이성계 장군을 이곳 왜구정벌 장수로 내려 보냈다. 태조대왕께서는 변안열(邊安烈)·퉁두란(퉁豆蘭)장군과 전주·남원을 거쳐 운봉(雲峰)을 향해 진군하던 도중, 아흔아홉 구비의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 이때 이성계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가 고개 정상에 이르렀을 무렵 갑자기 안개가 자욱하여 시야를 가리더니 비몽사몽간에 노파(老婆)[비문에는 도고(道姑)라 되어 있다.] 한 분이 이성계 장군앞에 나타나 왜구와 싸울 시기와 장소 방법을 일러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노파는 전략을 일러 준 후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니, 아침 햇살이 밝게 비친 맑은 날씨였다. 그 노파는 당시 경남 함양지방의 미모단정한 주부였는데 왜장 아지발도가 그녀를 희롱하며 젖가슴에 손을 대니 칼로 자기 젖가슴을 후려치고 자결한 원신(怨神)으로서 노파로 변신하여 태조대왕께 전략을 일러 준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여원치 여신상은 왼쪽 젖가슴이 없으며 그 노파가 지적하여 준 결전의 장(場)은 곧 운봉 황산(荒山)이었다.
  • 다른 한편으로는 왜적이 함양의 사근역을 유린하고 남원성을 향하는 도중 여원치 주막에서 술을 청하여 진탕 마시다 얌전한 주모를 위협하여 주모의 손목과 젖가슴을 만지며 방자한 행동을 하였다.
  • 이런 수모를 당하고 난 주모는 비분하여 부엌칼로 자신의 젖가슴을 도려 내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그 후 이런 주모에 대한 소문이 퍼져 이곳 주민들은 그 주모의 절개를 높이 기리기 위하여 그 자리에 비석을 세우고 그의 제각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 여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그 여인의 몸에서 물이 흘러 그 아래 마을 밭에서 자라는 풀이 쪽(藍)빛으로 변하였다고 하여 지금도 그곳 지명이 남평리(藍坪里)로 되어 있다.
  • 그 사연이 있은 뒤부터 이 고개 이름을 여(女) 자(字)를 붙여 여원치(女院峙)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여인의 원혼이 산신 할머니로 변하여 왜구 토벌을 위해 병막동에 잠시 주둔하던 이성계 장군의 꿈에 나타나 전승을 계시하였다고도 전한다.
  • 이성계 장군은 전략에 따라 여원치 정상에 진을 치고 북쪽을 바라보니 약 3km 지점에 투구를 쓴 것과 같은 괴이한 산이 우뚝 솟아 있어 제왕산(帝王山)이라 이름하였다. (당시 태조봉 이라고도 했는데 현재는 고남산이라 부른다.) 이성계 장군은 곧 제왕산으로 진군하여 동과 서에 각각 천하대장군을 한쌍 씩 권포리 마을 앞에 세워 잡귀를 쫓게 하고 해발 850m 정상에 올라가 석축으로 제단을 쌓게하고, 권포리(權布里)마을 복판 바위 틈에서 솟는 정화수(井華水)를 떠다 7일 간을 밤낮으로 제사를 모시며 팔도산신을 불러 전승을 기원하였다. 또한 밤에는 수천개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워 불과 5∼6km 전방에 있는 왜구를 위압하였다. 이성계 장군은 제사를 올리는 동안에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휘하의 용장을 적진 근처에 밀파했다. 7일 기도를 끝낸 이성계 장군이 지세를 살펴보니 전방 4km지점에 황산이 있었다. 황산 동쪽으로 맥이 이어지다 우뚝 돌기한 정산봉은 인월 지방을 한눈에 살필 수 있고 왜장 아지발도군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살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성계 장군은 곧 황산에 진을 치고 다음날 황산계곡으로 왜적을 유인하여 결전을 치루었다. 이성계 장군의 화살이 왜장 아지발도의 투구를 벗기니 왜장이 "아 황산바람 세군" 하며 입을 벌리는 순간 퉁두란(이지란)의 화살이 왜장의 목구멍을 뚫어 피를 토하고 쓰러지니 왜구들은 풍지박산하여 전멸하니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것이 역사에 유명한 운봉 황산대첩(荒山大捷)이요, 현재 남원∼진주간 국도변 황산계곡 피바위에 말발굽과 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때가 고려말 우왕 6년(1380) 9월이었다.
  • 그래서 이성계 장군은 정성을 다해 노파를 만났던 여원치 석벽에다 왼쪽 젖가슴이 잘린 여상(女像)을 새기고 그 위에 집을 지어 여상을 영구히 보존하고자 산신각(山神閣)을 지었다. 그래서 그 후로 이곳을 여원치라 이름하게 되었고 여원치에서 잠시 병마를 주둔케했던 진지를 병막동(兵幕洞)이라 이르게 되었으며, 제왕산 산신제단에서 진지를 바라보니 비단으로 길게 다리를 놓은 듯하여 장교리(長橋里)라 이름하게 되었다 한다.
  •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산신각은 허물어지고 여상만 남아서 풍우에 시달리고 이끼가 끼어서 그 형상을 알아 보기 어렵게 되었다.
  • 이러한 사실을 옛 노인들의 전언(傳言)에 의해 알게 된 운봉현감 박귀진(朴貴鎭)이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석벽의 여상에 끼어 있는 이끼를 씻어 내니 산신과 같은 여상이 완연히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운봉현감 박귀진은 목수를 시켜서 옛날과 같이 집을 다시 건축하니 때는 광무 5년(1901) 7월이었다. 운봉현감이 집과 여상을 복원한 그 옆에 이 여상의 연유에 대한 비문을 새겨 놓았으니 그 비문은 오늘까지도 그곳에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일제 말기 산신각은 허물어져 그 흔적만 남았고 여신상은 풍우에 시달린 채 600년 전 호국의 얼을 상징하고 있다. 다만 비문의 어떤 부분은 글씨를 알아 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음이 안타깝다.
여원치의 한
  • 남원의 동학 접주 김개남 장군은 전봉준 장군의 격문을 보자 남원의 모든 동학들을 모아 삽시간에 남원성을 점령하고 교룡산성에 들어가 군세를 크게 떨쳤다. 이때 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동학군에 식량을 보급하는 것은 모두가 자발적이어서 주로 신정동, 화정동, 향교동, 왕정동, 대산면, 왕치면은 번갈아 가며 그들에게 군량을 공급하였다.
  • 그러나 운봉만은 동학군이 점령하지 못하였다. 이 때의 운봉군수 이의경은 세력있는 지방 호족들과 일치단결, 장정들을 모집하여 훈련을 하는 한편 군량과 군기를 넉넉하게 준비하여 남원 동학군의 기습을 방비하는데 만전을 기하였다. 때마침 운봉 장정들중엔 통솔할 만한 인재들과 지도자가 많았으니 박봉양, 서영환, 박봉규, 김사마, 김마전등 여러 부장들과 협력하여 장정을 충분히 조련시키고 또한 동학의 움직임을 첩보병을 놓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 첩보병들의 보고에 의하면 동학군은 수일 안으로 운봉을 점령하려 서두르고 있다 하니 일목장군은 동학군을 여원치에서 방어하기로 작전을 세우곤 산봉우리에 빽빽하게 서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마다 큰 바윗돌을 무수히 매달아 두었다. 동학군은 1만여명이 대오를 정비하여 운봉을 향해 출진하였다. 갈치방(葛峙坊 : 지금의 남원시 식정동 부근)을 지나고 요천강을 건너 백파방(百波坊 : 지금의 이백면 남계리)을 지나 선봉부대가 여원치 문턱에 닿았다. 김개남 장군은 전군을 일단 재점검 한후 여원치를 오르기 시작하였다. 대군은 숨을 헐떡이며 서로 공을 다투어 산을 메우고 골짝을 덮어 위로 올라가니 숨은 가빠 헐덕이고 땀은 흘러 옷을 적신다. 이때 일목장군은 5천 병사들을 뒤로 숨긴 채 말에 자갈을 물려 울지 못하게 하고 동학군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여원치에서 멀리 서남쪽을 굽어 동학군들이 올라오는게 훤히 보인다. 마침내 동학군이 여원치로 올라왔음을 확인한 일목장군은 명령을 내렸다.
  • 「나무에 매어둔 바위를 모두 아래로 굴려라 !」
  • 「활을 쏘아라 !」
  • 김개남 장군은 여원에서 군사를 태반이나 잃고 패잔병을 이끌어 남원으로 후퇴한다. 그러나 이때 박문달은 세 번째 명령을 내린다.
  • 「총 공격! 동학군을 모조리 섬멸하라 !」
  • 운봉 장정들은 동학군의 뒤를 맹렬하게 추격 하였다. 패잔병을 점검할 틈도 없이 김개남 장군은 쫓기어 남원성에 도착하자 사대문을 굳게 닫고 병력을 재 정비하여 성을 지키기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여원치에서 치명상을 입은 동학군의 하늘을 찌를 둣하던 기세는 간곳없고 사기는 좀처럼 회복되지 아니 하였다.
  • 한편 운봉 장정들은 남원성을 포위하여 공격을 늦추지 아니하지만 일목장군은 초조하였다. 장기전으로 될 경우 군량이 떨어지면 운봉에서 운반해와야 하는데 그러자면 문제가 많아 속전속결로 지체없이 승부를 판가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문과 북문에 불을 질렀다. 이에 동학군이 있는 남원성에 운봉 장정들이 물밀 듯 들어가 동학군을 몰아내고 남원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 이때 운봉 의병들이 소비한 군자금은 모두 8천량인데 동학군이 평정된 뒤 조정에서 이 돈을 운봉군민에게 모두 갚아 주었으며, 한편 수백년 내려온 남원성의 동문과 남문을 성급하게 태워버린 박문달의 허물은 그가 동학군을 격파한 공이 컸으므로 이를 용서하고 벼슬을 주어 그 공적을 크게 들어내 주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