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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면 행정복지센터

대강면 전설

평촌리 조산

평촌마을의 동쪽과 서쪽에 조산의 흔적이 있다. 이것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을에서 건립하였으나, 서쪽에 위치한 곳은 지방도 730호 도로 확·포장공사로 헐리게 되었고, 동쪽은 그대로 흔적이 있다. 이 조산은 당초 마을터는 개구리 명당인데 뱀혈인 앞산이 마을을 향하여 있으므로 개구리를 보호하기 위해 마을 앞에다 소나무를 심고 입석을 세워 뱀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수호신 역할을 했다고 한다. 특히 이 조산은 수구막이로 마을이 밖으로 노출되면 불길하다고 하여 동탑과 서탑을 세웠는데 동탑은 높이가 120cm이고 서탑은 180cm로 그 위에 입석이 있는데 높이가 50cm이다.

양촌리 솟대

양촌마을 사람들은 솟대를 거렛대라고 부르고 있다. 양촌마을에서 거렛대를 세운 것은 마을 앞에서 훤히 보이는 고리봉이 화산(火山)이어서 마을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였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하여 3기의 거렛대를 만들어 세운 후에는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거렛대는 높이고 5~6m이며 직경은 10cm 정도로 소나무로 만들었으며 한쪽에는 꼭대기에 오리가 없다.

가덕리 당산

가덕마을에는 마을 입구에 10그루의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지금은 6그루만 남아있다. 그 중 한그루는 팽나무이고 나머지는 느티나무다. 팽나무는 둘레가 327cm이고 나머지는 각각 330cm, 327cm, 310cm, 400cm, 220cm 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당산나무에 해를 입히면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옛날 어떤 사람이 당산나무의 가지를 잘라서 불쏘시개로 쓴 후에 시름시름 앓다가 3일만에 죽었다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은 도끼로 당산나무를 내려치니 그 자리에서 피가 나왔다 한다. 그래서 그 후로는 당사나무에 해를 입히지 않았다고 한다.

송내리 중 바위

송내마을 송강제 소류지 아래 100m 지점에 스님 상을 한 바위가 있다. 높이가 1.75m, 몸통둘레 1.5m이며, 삿갓둘레가 3.0m 인 이 바위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90년경으로 추정된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당시 마을이 빈곤하여 시주를 하러온 스님에게 시주는커녕 갖은 학대를 다하니 스님이 화가 나서 마을 앞에 이 바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 스님형상을 한 바위(입석)을 마을 사람이 깨뜨리니 마을이 더욱 빈곤하여져 다시 입석을 세웠고 그 이후 마을이 점차 부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70년경 야간에 입석을 도난당하였고 현재 입석은 이 마을 출신 스님 황기연(黃琪淵)이 사비를 들여 1980년대에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옥전리 효자문

옥전마을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의 주산이 목사(木祀)이고, 이씨는 화성(火姓)이므로 목생화(木生火)의 이치에 따라 이씨가 번성하였는데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한 이홍인의 후손인 이기섭은 노년에 병이 많아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극진히 간호하여 대소변도 받아내고, 또 병이 위중 할 때는 자기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여 부모님의 온갖 병을 구환하였다. 이것이 마을 전체에 퍼지자 이를 기리기 위해 마을에 효자문을 세우게 되었다.

월산리 신당골

조선조 중엽 허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옥출산을 넘어오다 달이 갑자기 튀어 나오 듯 솟아오르며 한줄기 달빛이 무지개처럼 뻗어 유난히도 밝게 비치는 곳이 있었다. 허씨는 그곳을 보면서 저곳이 내가 정착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래서 마을 이름을 월산(月山)이라 하였다. 월산마을의 옛 이름은 신당골이라고 한다. 그것은 옛날 어느 선비가 여러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관운이 없어 번번이 낙방하여 실의하다 이곳 월산에 찾아와 후손들에게 꿈을 이루려고 고개 마루터에 신당이라는 서당을 지었다하여 신당골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방동리 꿩명당

방동마을의 주룡인 망월동산에 진순응(晉順應)의 묘를 쓰면서 천광을 다듬어 놓고 계명초시를 기해 하관하려고 기다리는데 바로 아래 대밭에서 꿩이 한 마리 울며 날았다. ‘꿩대닭’이란 말이 생각나서 닭 울음으로 보고 묘를 썼다. 그후 손자대에 이르러 장손 진항복(晉恒復)의 꿈에 꿩이 한 마리 울며 날아 들어와 품에 안겼다. 이튿날 형제들이 조반을 함께한 자리에서 꿈 이야기를 하자 막내인 진창복(晉昌復)이 자기 꿈이라고 가로챘다. 창복이 그날로 과거길에 올라 문과 대과에 급제하였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꿩이 하관시간도 알려주고 등과도 현몽해 주었으니 ‘꿩명당’이 분명하다고 감탄하였다. 그리하여 꿩명당설이 전해지고 있다.

분책설(焚冊說)

방동마을 뒷산인 방동리 산 34번지 동남쪽 산기슭에 1800년경 서당이 창설되어 1900년경까지 100여년에 걸쳐 네 사람의 훈장이 후세교육에 힘써 많은 영재를 배출시킨 마을내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100년 고개를 넘으면서 서당에서 글 읽는 소리만 나면 책에 불이 붙어 타버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펴보는 책만 불타더니 시일이 지나면서 벽에 걸어놓은 책까지도 불에 타는 것이다. 아무리 불 단속을 해도 불씨가 어디서 나와서 불이 붙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책만 불타지 다른 물품은 전혀 불이 붙지 않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결국 서당을 철폐하고 마을 안으로 옮겼으나 책이 불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는 원한 맺힌 신(神)의 소행이다. 분책(焚冊)을 면하려면 신(神)을 달래야 한다는 등의 소문이 난무하였다. 서당이 존폐위기에 높이고 분책이 또 어떤 재앙으로 변할지 몰라 공포와 불안으로 의기소침해 있는 학동들에게 신을 달래야 한다는 말이 구원의 복음으로 들렸다. 그리하여 점을 보아 비손을 하기로 하고 진기회(晉璣檜), 박영찬(朴永贊) 등이 대표가 되어 순창군 유등면 책바우에 사는 용하다는 서과택을 찾아가 문복(問卜)을 하기에 이르렀다. 점괘를 풀어나가던 서과택이 두 사람의 손을 덥석 잡더니 갑자기 서글프게 울부짖었다. ‘나는 이 서당의 훈장을 했던 김익찬으로 내게 자식과 조카가 있으나 제사를 지내주지 않으니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구나, 어쩔 수 없이 너희들에게 물밥이라도 좀 얻어먹고 싶어서 찾아간 것이 피해가 되었노라’며 넋두리를 떨었다. 듣고 있는 동안 선생님의 처량한 모습이 그들의 눈에 아른거렸다. 김익찬(金益燦)선생의 자(字)는 기호(璣昊)요, 호(號)는 송헌(松軒)이다. 김해김씨(金海金氏) 삼현공(三賢公) 관(管)의 18대 손이며 방동 입촌조(芳洞 入村祖) 김만추(金萬秋)의 아들로 1837년 출생하여 해박한 학식과 덕행을 겸한 학자로 1864~1895년까지 훈장을 지냈다. 선생에게는 아들과 조카가 있었으나 아들은 객지로 나가서 소식마저 끊기고, 조카는 끼니갈망을 못하는 어려운 형편으로 제사를 지낼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나마 의지할 곳은 제자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점장이가 시키는대로 제자들이 지성을 다해 제수를 장만해 놓고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그 뒤로는 일체 책이 불에 타는 재화가 없어졌으나 ‘분책설(焚冊說)’은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방동리 선두거리

방동 마을앞 구릉지대의 남쪽끝 언덕에 두 개의 돌이 서 있어 언제부터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선두거리 또는 도끼머리라 부른다. 어느때 어떤이가 무슨 목적으로 세운 것인지는 모르나 약 100m의 거리를 두고 동, 서쪽에 양립하고 있는데 동쪽의 돌은 높이 2m, 폭 36~45cm이고 서쪽에 있는 돌은 높이 3m, 폭 36~40cm의 네모진 두 개 돌에 구경 17cm의 구멍이 위, 아래 두 개씩 뚫어져 있다. 옛날에 이 돌이 서 있는 언덕 밑 구렁으로부터 방들까지가 모두 깊은 강이어서 배를 이용하였다고 하며 뱃줄을 매기위해서 배말뚝으로 두 개의 돌은 세운 것이 이 입석이라고 하며 뱃머리가 닿은 선착장이라 하여 선두거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섬진강 강바닥이 점차 패여 낮아지며 강물이 빠지고 배는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설과 중국의 두사춘(杜士春)이라는 사람이 두리기(대강 진입로)를 잘라서 물을 뺐다는 말도 있으나 여하튼 지금은 물이 빠지고 배는 없지만 그로인하여 또 다른 전설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선두거리 배에는 구리쇠로 만들어진 큰 뱃고리가 두 개 있었는데 배가 필요없게 되자 이 고장 제일의 영산(靈山)에다 묻고 산 이름을 고리봉(環峯)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뱃고리를 묻은 골짜기를 고리안이라 불러오고 있다.

방동리 도끼머리

선두거리를 일명 도끼머리라고도 하는데 흡사 도끼모양으로 생겼다. 이 도끼날에 해당하는 언덕에 두 개의 돌을 세워야 했던 이유는 배말뚝이 아닌 또 다른 사연이 있었다. 옛적에 방뜰의 들가운데 장터거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한 대는 흥성했던 마을이 어찌된 일인지 점차로 쇠퇴하여 가고 읍력설을 지내고 난 뒤에 마을에서 맨 먼저 밖으로 나오는 소(소)가 까닭도 없이 죽어갔다. 이러한 재앙이 해마다 반복되며서 마을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당혹해 하였다. 무당을 시켜서 액맥이 굿도 하고 신불에게 기원도 해 봤으나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그러던 어는 봄날 한 길손이 혼잣말로 “도끼살에 장 파한다”고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까닭을 묻자 저 앞에 있는 언덕이 도끼날인데 이 장터거리를 찍고 있으니 마을이 폐할 수밖에 없다면서 도끼살을 막으려면 큰 돈을 세워서 도끼날을 어그러뜨려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리하여 장터거리 사라들이 살막이로 도기머리 언덕에 두 개의 돌을 세운 것이 이 입석이며 그대부터 이곳을 도끼머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순자강(鶉子江)

금지와 대강 경계에서 방동리까지의 섬진강 상류를 옛날에는 순강(鶉江) 또는 순자강(鶉子江)이라고 불렀다. 방뜰의 풍부한 곡식과 강에서 우굴거리는 물고기 등 무한량의 먹이에 강변의 무성한 수풀은 철새에게 천혜의 낙원지였다. 춘하추동 사철마다 갖가지 철새들이 찾아와 이 강변에서 서식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을에 떼를 지어 몰려와 성시를 이는 메추리가 가장 많이 서식하는 강이라하여 순자강(鶉子江)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남원시 송동면 두동리에 살고 있는 전주판관을 지낸 경주 김시 김취용(金就容)이란 사람이 병으로 몸져 눕게 되자 그의 아들 선무랑 김정설(金廷卨)이 지성을 다해 병구환을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그러던 5~6월 염천의 어느날 환자가 메추리 고기를 먹고 싶다고 원했다. 가을철이 되어야 찾아오는 메추리를 무더운 여름철에 구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 했으나 효성이 지극한 김정설은 천지신명에게 기원하며 메추리가 많이 서식한다는 순강을 찾아 두리기(대강면 입구) 강가를 더듬어 올라가는데 뜻밖의 기적이 일어났다. 메추리 한쌍이 하늘에서 강으로 떨어졌다. 김정설이 그 메추리를 가져다 부친에게 공양하니 병환이 말끔히 완쾌되었다. 나라에서는 그 효성을 표창하는 정려(旌閭)를 내리고 메추리가 떨어진 강이니 메추리 순(鶉)자와 아들 자(子)를 써서 순자강(鶉子江)이라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강석리 당산제

강석마을에는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손자 당산이 있다. 당산제는 마을 뒤의 할아버지 당산과 마을 입구의 할머니 당산에만 지내는데 당산형태는 모두 느티나무이다. 앞 당산은 둘레가 486cm이고 뒷 당산은 둘레가 346cm이다. 제단도 앞 당산의 제당은 가로 180cm이고 세로는 67cm, 높이는 29cm이다. 뒷 당산의 제단은 가로가 153cm이고 세로는 61cm, 높이는 26cm이다. 정월 14일 밤 12시경에 당산제를 지내고 제사후에 동네를 돌면서 굿을 친다. 제주는 깨끗한 사람으로 축관과 화주를 선정하고 이들은 보름동안 기우를 한다. 화주가 남원장을 보아 오는데 절대 물건 값을 깍지 않고 구입한다. 제기(祭器)는 화주 집에서 계속 보관하며 화주가 바뀌면 다시 구입한다. 제비(祭費)는 마을 각 집에서 추렴하여 충당하고 상가집은 제가 끝나고 나중에 받는다. 6․25 전쟁 중에는 중단되었으나 마을이 큰 피해를 입자 다시 계속 지내고 있으며, 당산제가 끝난 뒤 돼지머리를 당산에 묻는다.

평촌리 당산제

평촌마을에는 당산이 세군데가 있다. 마을동편에 할아버지 당산, 서편과 마을 윗쪽에 할머니 당산이 있다. 할아버지 당산은 소나무이고, 할머니 당산은 느티나무이다. 제사는 정월 열나흘날 밤 12시에 보름날 새벽까지 지낸다. 먼저 마을에서 굿을 치고, 당산에 올라가면서도 굿을 치는데 입당(入堂)하였다 하여 더 잘 친다고 한다. 이때의 굿패는 징 1개, 꽹과리 2개, 북 1개와 큰 기(旗)가 따라간다. 장구를 사용하지 않고 북을 치는 것은 장구는 개가죽이기 때문에 부정을 타므로 가지 못한다. 굿을 친후에 식을 진설하고 제사를 마친 후 음복을 한다. 제주는 축관, 헌관, 화주 등이 있으며, 옛날에는 제사 전으로 한달간, 제사후로 두달간 기우를 하였다. 지금은 화주는 일주일, 축관, 헌관은 삼일간 화장실을 다녀온 후면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 등 정성을 다한다. 화주는 음식을 장만할 때에 동네의 일정한 우물을 퍼내고 금줄을 치고 뚜껑을 덮어서 다른 사람은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정월 14일에 각 집에 금토와 금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제사 지내기 전에 샘굿을 먼저 친다. 제비(祭費)는 공동답이 있지만 이것은 대강면이 섬진강을 끼고 전남과 경계를 이루어 강을 건너는 배 삯을 그 논에서 나는 소출로 충당하고, 마을에서 각 집당 쌀 반되와 천원씩을 추렴하여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