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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면 행정복지센터

무민공 황진 가전고문서(武愍公 黃進 家傳 古文書)

무민공 황진 가전고문서(武愍公 黃進 家傳 古文書)

  • 지 정 : 보물 제942호(1987.12.16)
  • 위 치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양촌), 대산면 대곡리
  • 규 모 : 1괄 14종 125점(풍산 : 4종 58점, 대곡 : 12종 67점)
  • 시 대 : 조선시대

장수황씨(長水黃氏) 문중의 고문서로서 대강면(帶江面) 풍산리(楓山里)와 대산면(大山面) 대곡리(大谷里)에 세거하는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 장군의 후손인 황호연(黃鎬淵)과 황맹연(黃孟淵) 집에서 각각 보관하고 있다.
이 문서는 조선 선조 때의 무신으로 2차 진주성싸움에서 순절한 무민공 황진(1550~1593) 장군의 후손 집안에 400여년간 전해 내려온 것이다. 황진과 관련된 문서들을 중심으로 두 아들의 문서들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사실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자료로 평가되는 이 고문서들은 총 14종 125점이다.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 1550년~1593년)의 자(字)는 명보(明甫), 호(號)는 아술당(蛾述堂),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영의정 황희(黃喜)의 5대손인 윤공(允恭)의 둘째아들이다. 선조(宣祖)9년(1536)에 무과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선조24년(1591)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日本)에 다녀와서 그들의 침공(侵攻)이 있을 것을 예언했다. 1592년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관찰사(觀察使)를 따라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용인(龍仁)에서 왜군(倭軍)과 싸웠다. 이어 진안(鎭安)에 침입한 왜장(倭將)을 사살하였다.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이 되어 이치(梨峙)싸움에서 적을 격퇴, 그 공으로 익산군수 겸 충청도 조방장(益山郡守兼忠淸道助防將)에 오르고, 이듬해 충청도병사(忠淸道兵使)에 승진하여 연승(連勝)을 했다.
왜적의 대군이 진주(晋州)를 공략(攻略)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과 진주성(晋州城)에 들어가 고수(固守)하며 역전하다가 전사하였다.
좌찬성(左贊城)에 추증(追贈)되고 진주(晋州)의 창렬사(彰烈祠), 남원(南原)의 정충사(旌忠詞)에 제향(祭享)되었다.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3등과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策錄)되었다. 시호(諡號)는 무민(武愍)이다.
고문서(古文書)는 조선 선조 때의 임진공신으로 유명한 무민공 황진 장군과 그의 아들 손자가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아감에 따라, 조정에서 발급한 교지를 비롯하여, 상속문서인 분재기(分財記), 명문(明文), 청원서인 소지(所志), 관공문서인 유지(有志)?입안문(立案文), 교지(敎旨), 완문(完文), 단자(單子) 등 무려 208점에 이른다.
모두 다 조선중기의 정치?경제?사회 및 임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아 그 중의 125점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박세중(朴世中) 가전고문서(家傳古文書)

박세중(朴世中) 가전고문서(家傳古文書)

  • 지 정 : 지방유형문화재 제147호(1995. 6.20)
  • 위 치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 207-1번지
  • 규 모 : 1괄 5종 29점
  • 시 대 : 조선시대

밀양박씨 무은공파 종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조선 중기에서 후기까지의 고문서이다. 나라에서 공을 세운 신하에게 공신으로 봉한다는 임명서인 진무원종공신녹권(振武原從功臣錄券), 정사원종공신녹권(靖社原從功臣錄券)등 2건, 임금이 신하에게 전달할 명이나 뜻을 담아 보내는 교지(1623~1647) 11건, 일반 사람이 청원한 일을 관에서 확인해주는 문서인 완문(完文, 1846~1857) 3건, 호구(戶口)관련 문서인 호적단자(戶籍單子,1747~1801) 7건, 일반 백성이 관에 내는 진정서인 소지(所志, 1806~1842) 6건 등이 있다. 완문(完文), 소지(所志) 등은 민간인과 정부 및 관공서와의 상관관계를 알 수 있으며, 호적단자는 조선 중기 사회상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풍계서원(楓溪書院)

풍계서원(楓溪書院)

  • 지 정 :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54호(1984. 4. 1)
  • 위 치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 132-1번지
  • 시 대 : 조선시대

풍계서원은 조선 세종조의 명재상 영의정 황희(黃喜)를 중심으로, 오상덕(吳尙德), 황위(黃暐) 등의 3현을 배향하고 있다.
황희는 그 선조 대대로 남원과 장수에 살았는데, 아버지 황군서(黃君瑞)가 당시의 서울인 개경((開京:개성)으로 옮겨갔다. 황희는 공민왕 12년(1363년)에 개경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하였다. 고려말 두문동에 들어간 황희는 72현의 대표로 조선 조정에 파견되어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새 출발을 하였고, 뒤이어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세자 책봉문제로 태종과 이견을 보여 3년간 남원으로 유배되었다. 황희는 남원 유배 생활동안 그의 6대조 황감평(黃鑑平)이 지은 일재(逸齋)의 옛터에 작은 누(樓)를 세워 광통루(廣通樓)라 이름하고, 이곳에서 독서를 많이 하였다.
오상덕(吳尙德)은 세상의 영욕과 인연을 끊는다는 뜻에서 스스로 두암(杜庵)이라 호를 붙였다. 고려말기의 대학자인 이색(李嗇),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등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불교를 누르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왕에게 여러 차례 상소하였다. 그는 방촌(尨村) 황희의 자형(姉兄)이 되며, 벼슬이 소부시(小府侍) 소감을 지냈으나, 조선 개국 후에는 관직을 버리고 고려의 유신들과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를 지킨 분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황위(黃暐)는 아호를 당촌(塘村)이라 하며,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국한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장군의 후예이다. 일찍이 사마과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고 효종때 한성부(漢城府) 서윤(庶尹)을 지낸 바 있다. 시문에 능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노후에는 후학 교육에 여생을 마쳤다.
풍계서원은 정조12년(1788)에 지었으며, 고종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어 황희 영정만을 모셔오다가 1909년 복원하였다. 현재 서원 안에는 강당, 사당, 내삼문 등이 있다.

십노사(十老祠)

십노사(十老祠)

  • 지 정 :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 59호(1984. 4. 1)
  • 위 치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대강면 생암리 산47-1번지
  • 시 대 : 조선시대

이 사당은 조선조 단종이 세조에 의해 폐위된 일에 항거한 단종의 유신(遺臣)과 당대의 절사(節士) 열명(十人)의 영정을 모시고자 철종 13년(1862)에 세워진 것이다. 이들은 이윤철(李允哲), 안정(安正), 김박(金博), 한승유(韓承愈), 설산옥(薛山玉), 설존의(薛存義), 오유경(吳惟敬), 신말주(申末舟), 조윤옥(趙潤玉), 장조평(張肇平) 등으로 단종 폐위때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이 열 분의 현인은 모두 단종 당시의 신하이거나 당시의 명사들이었으며, 서로 직책은 달랐으나 나라에 충의를 다할 것을 함께 맹세하였다. 세조가 어린 단종을 죽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시국을 개탄한 나머지 모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숨어살면서 거짓으로 미친 척하거나, 혹은 술을 벗삼아 세월을 보냈다. 뒤에 후손들이 이러한 선조들의 고결한 절개를 흠모하여 십노계를 조직하고 3칸의 사당을 건립하고 십노사라 하여 매년 향사 하고 있다.
십노사에 있는 십노계첩에는 십노계를 조직한 유래와 과정 등을 설명하였고, 열 명의 현인들이 낙향하여 생활하던 당시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와 그들이 남긴 시문이 한편씩 실려 있다. 십노사의 정문에는 미풍문(美風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풍양사(楓陽祠)

풍양사(楓陽祠)

  • 지 정 :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155호(2000. 6.23)
  • 위 치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 261-3번지
  • 규 모 : 1원(417㎡)
  • 시 대 : 조선시대

조선시대 무신인 박세중(朴世重, 1595~?)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박세중의 자는 군극(君極)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밀성부원군 언부의 13세손이며 참판에 증직된 검종(檢宗)의 아들로 1595년 남원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용기가 있었으며, 23세때인 광해군11년(1618) 무과에 급제하고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1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 왕이 공주로 피신할 때 옥쇄(玉碎)를 안전하게 보관하여 2등공신에 녹훈되고 충주부사가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대항했으나 임금이 강화에서 중국 청나라에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이 건물은 숙종12년(1685)에 세우고 고종43년(1905)에 고쳐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조선후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조선중기의 사회상을 연구할 수 있는 6권의 박세중 가전 고문서(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147호)를 함께 보관하고 있다.

무진정(無盡亭)

무진정(無盡亭)

  • 지 정 :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164호(2000.11.17)
  • 위 치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대강면 방산리 456-1번지
  • 시 대 : 조선 선조시대(1751년)

이 정자는 1751년 남원윤씨 죽곡파 종중의 선조인 무진(無盡) 윤정근(尹廷根)이 선산 자락에 세운 것으로 본래의 이름은 무진장(無盡藏)이었다. 그는 방산나루터에서 섬진강을 건너 남북으로 오가는 길손들이 쉬어가도록 이 정자를 지었다.
건물의 바깥 부분에는 원형 기둥을 썼고 안쪽에는 사각기둥을 세워 다채로움을 더했고, 뒤편 마루를 앞마루보다 조금 높게 깔아 앞뒤의 공간을 나누었다. 부분적으로는 이처럼 세심한 변화가 있으나 전체적인 모습은 단정하다.
세월이 흘러 나루터도 인근의 주막 터도 없어져 인적이 드물어지자 외진 곳이 되어 건물이 쇠폐해졌고, 묵객들이 걸어놓은 여러 점의 시문 현판도 많이 낡아 지나는 이들의 아쉬움이 컸었다. 뒤늦게나마 전북특별자치도 지정문화재가 되었고, 2003년에는 쇠락한 정자를 보수하였다. 따라서 무진(無盡)이라는 이름처럼 오래도록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정자로 남게 될 것이다.
2001년 10월 이 부근을 경유하는 국도 13호선이 지정되었다. 2004년에는 이웃 곡성군(종방나루)을 잇는 교량이 가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