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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면 행정복지센터

방동

방동리는 방골(芳洞)과 닥밭골(楮洞)을 함께 부른 이름이다. 1420년경에 남원晉씨 정착조인 진호노(晉虎老)가 문덕봉 아래 시전동( · 田洞, 송내리)에 은둔하면서 지역의 산세를 살피다가 방골이 좋은 땅(吉地)임을 발견하여 후손들의 세거지(世居地)로 삼게 되었다.

저동도 같은 시기에 남양房씨의 정착조인 방덕준(房德駿)이 만고 불변의 피난지이자 후손들의 좋은 세거지로 여겨 처음 정착하였다고 한다.

방덕준은 진씨 가문에 장가를 들었기에 진호노와도 우의가 돈독하였으며 다 같이 학문이 높고 주역과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마을의 서쪽에 꽃을 상징하는 꽃봉(花峯)이 있고, 남쪽에는 매화꽃을 상징하는 매산산등(梅山山登)이 있으며, 마을 주변의 산세가 마치 피어나는 연꽃처럼 보인다 하여 ´꽃다운 마을´이라는 뜻으로 ´꽃다울 芳´자와 ´골 洞´자를 쓴 방동(방골)이라 한 것이다.

방골 · 꽃봉 · 매산등에 꽃이 피고 마을의 큰 샘에서는 꿀물이 넘쳐흐르니, 벌과 나비가 기뻐서 어지러이 춤춘다 하여 분무골(紛舞洞)이라는 지명도 생겨났다. 이렇듯이 마을의 모양이 온통 꽃을 상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옛날부터 지켜 내려온 마을의 ´집앞방죽´에는 지금까지도 해마다 붉은 연꽃을 가득 피우고 있다

´닥밭골´은 한지(韓紙)를 만드는 재료가 되는 닥나무(楮木)밭이 많았다하여 ´닥나무 楮´자와 ´밭 田´자 ´골 洞´자를 써서 한자로 ´저전동(楮田洞, 닥밭골)´이라 하였다. 그 후 전(田)자를 뺀 ´저동(楮洞)´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남원부 서면 생조벌방 1리 방동´이라 하였다고 한다.1914년 남원군 대강면 방동리로 개칭하였고, 1981년 7월1일부터는 행정리를 편동과 양동으로 분리하였다. 1995년 1월1일 도농복합시 출범으로 ´남원시 대강면 방동리´가 되었다.

옛날 방동마을 출신 중에는 과거에 급제한 인재들이 많았다.1444년(세종 26년)에 방덕준(房德駿), 1480년(성종 11년)에는 진부석(晉扶碩, 호 石溪)과 방필경(房必敬)이 소과(생진과)에 급제하였고, 1860년(철종 11년) 진창복(晉昌復)은 대과(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박사를 지냈다고 한다.